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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7장 1-10절 백부장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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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장 1-10절
7:1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되었더니 3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4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5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합당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합당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은 합당하게 어떠한 지위를 갖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유대의 장로들이 백부장을 보고 "합당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오늘 이 백부장이 사랑하는 하인이 병에서 나은 것은 정말 이 사람이 합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을까요?

사실 오늘 본문을 다른 관점으로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당하다'는 말을 되게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도 합당하게 받기를 원하고, 인정을 받는 것도 합당하게 받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공정 사회, 민주주의, 그리고 과거와 다른 정의와 공의, 공정함이 드러나는 사회에 익숙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는가는 다른 이야기지만,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합당한 자가 되기를 참 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틀리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합당하다'는 의미는 좀 다른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과 사회가 말하는 정의, 공의, 합당함과 하나님 나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야기하는 정의, 공의, 합당함이 과연 같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그대로만 이해하면, 모든 사람이 인정한 그 합당한 자에게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 1절, 처음 시작된 이야기를 먼저 이해하고, 왜 마태는 의도적으로 여기에 이 이야기를 배치했는지를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7장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6장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열두 사도를 세우신 다음에 평지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평지 설교가 다 마친 후에, 지난주에 저희가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는데, 갑자기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다음에는 나인성에 있는 과부를 살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속에서 수많은 병 고침의 사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평지 설교 다음에 백부장의 하인과 과부의 이야기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구성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2000년 전 당시의 관점에서 과연 7장에 이야기되고 있는 이 사람들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옛 언약, 모세 율법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던 구성원과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의 구성원의 차이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합당함의 기준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백부장이 등장하는데, 그는 로마 군대 시스템 안에서 100명, 보통은 60명에서 80명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교였습니다. 귀족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귀족은 천부장부터 시작한다는 문서들이 있으니, 보통 유대인들의 시각에서는 로마 시민권자, 평민으로서의 시민권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민권자가 유대의 땅에 있으니 그 위치가 좀 달랐을 것입니다. 단순한 로마의 일개 백부장이 아니라 점령군의 백부장이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회당을 지어줄 정도의 힘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열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로마의 대단한 권력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당시 유다 지방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 이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낸다는 점입니다. 이 보냄이 자발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권력에 의한 것이었을까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발적인 보냄에 수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인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이 사람에게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이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셔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지금까지 예수님은 대부분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부장의 하인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다며 증거를 제시합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했고,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습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성전에 가는 것은 큰 결단과 헌신이 필요했지만, 당시에는 회당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부장이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하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지어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합당하다고 칭송하지만, 그 칭송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유대교를 받아들인 경건한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을 그냥 읽으면 유대의 장로들이 엄청나게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성향을 보면 그들의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아, 이 사람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고 회당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이방인의 뜰까지입니다. 결코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라고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모세 율법의 한계적인 부분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예수님께서 6장에서 평지 설교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대조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였습니다. 옛 언약, 옛 시대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어떤 나무였을까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선한 민족이고,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가운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더 좋은 열매를 자랑하며 그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끊임없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흠을 잡습니다. "너희는 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느냐?",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과부나 나병 환자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2000년이 지난 지금, 교회 안에서도, 소위 기독교라는 문화 안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합당한 행위를 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사업에 실패하거나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면 "기도가 부족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못해서" 심판받고 있다고 지적하며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려는 일들이 많습니다. 옛 시대의 율법주의적, 기복 신앙적 판단이 기독교 안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합당한 기준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합당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합당한 기준을 백부장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대 장로들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병 고침이었지만, 예수님은 이 사건을 단순히 병 고침의 사건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이야기이며, 새로운 나라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대 장로들은 하인의 병 고침이 합당하다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하인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은 이러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눈을 바꿔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예수께서 함께 가실 때 백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말합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 알았나이다." 이것은 백부장의 자기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의 장로들은 "이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고 회당을 지었으니 빨리 병을 고쳐주십시오"라는 뉘앙스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백부장이 힘이 있고 합당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왜 백부장의 믿음이 뛰어나다고 하셨을까요? 결국 백부장은 예수님의 평지 설교대로 마음이 가난한 자, 낮은 자리로 간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백부장이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환난과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집을 흙이 아닌 반석 위에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고,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 자인지 알았습니다. 그는 유대 장로들이 말하는 것처럼 병 고침을 받기에 합당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병 고침 기록에서 나오는 외침은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였습니다. "내가 합당하니 나를 고쳐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석 위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나의 연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보잘것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흙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자신의 강함, 위대함, 능력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기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의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하는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고, 내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하나님, 오늘도 제가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습니다.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습니다. 자랑스럽지 않으십니까?"라고 나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오늘도 제가 보시기에 제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네요. 부족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라고 나아가시겠습니까? 만약 그런 마음으로 나아가신다면 이곳이 은혜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요하고 간단한 진리를 쉽게 놓쳐버립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생활을 합당한 태도,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훈련받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합당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반석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합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기 때문에, 그에게 접붙여졌기 때문에 우리 삶 속에서 놀라운 기적과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성령 때문에 강퍅한 내 마음속에 사랑의 능력이 나타나고, 무능력한 내 삶 속에서 성령께서 나를 움직이셔서 긍휼과 사랑이 드러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나와 예수님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연약함의 고백의 핵심은 나의 주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내가 너에게 힘을 줄 테니 나를 따르라"고 유혹합니다. 헛된 야망과 꿈을 주어 그것을 쟁취하게 만들어 결국 하나님을 떠나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나라의 원리를 통해 강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연약한 자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질 것이고, 낮은 자리에 있으면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오히려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낮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진 부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 부와 돈도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다 보면 내가 백만 장자이든 천만 장자이든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강력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관이든, CEO든, 명예직을 가진 사람이든 하나님의 공동체에 오는 순간 의도적으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내 지식과 명예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가정에 적용해 본다면 어떨까요? 유교는 가부장적이고 순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된 자로서 오늘 본문의 도전을 받는다면, 우리의 반석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의도적으로 자녀를 섬기고, 아내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속에서 내 아내와 남편에게 이 일들을 먼저 적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나는 연약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연약함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인간은 숨을 쉬는 순간, 내가 지키고 싶고 갖고자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락에 떨어져도 기본적으로 내가 산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어려운 것입니다. 밖에서 인정을 못 받아도 가정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솔직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지금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나에게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이유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부모가, 내 자녀가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이 삶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로서 살겠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고, 부모로서 내 인생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살았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내 아내가 당신 때문에 내 인생 다 버리고 수십 년 동안 고생했다는 외침이고, 내 남편이 당신을 위해서 밖에서 힘들게 고생하고 모욕당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 살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유는 바로 "내가 당신에게 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가라 하시면 가겠고 오라 하시면 오겠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시옵소서"라는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화답은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지 못하였노라"였습니다.

우리가 약해지는 것이 내 인생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수없이 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그것을 붙잡으려 하고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새 나라의 원칙은,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새로운 나라의 묘미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믿음이 뛰어나다고 말씀하시자 고향 사람들이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좋은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나쁜 나무였던 그들의 믿음이 더 뛰어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똑같은 지역에서 새로운 나라의 원칙으로 다시 한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보다 백부장의 믿음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좋았던 이유는 유대 장로들이 말했던 결과물, 즉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헌금 생활을 잘하고,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직분을 가졌고,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연약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지금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는 모르겠지만 가정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해야 하는 것조차 내려놓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섬기는 자로, 연약한 자로 나아가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의 애통함, 가난함, 연약함을 고백할 수 없는 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이보다 큰 믿음이 없다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칭찬을 받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약한 마음으로, 나의 못된 모습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증거되기를 소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괜찮지 않은 인생, 따라가고 싶지 않은 인생, 하찮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만한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해 주시면 끝나는 것 아닐까요? 1년 후, 10년 후에 내 자녀가 돌아보면서 "우리 가정의 주인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님이셨구나. 예수님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내가, 남편이 변했구나"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공동체도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에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의 평지 설교는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것과 180도 다른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반석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반석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귀를 기울이시겠습니까? 누구를 따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백부장을 보여주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계를 뛰어넘는 일들을 보여주는 샘플입니다. 백부장도 했다면, 과부도 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망과 은혜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떻고, 무엇이 있다는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백부장을 구원하셨고, 과부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는 끝난 것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제 그것들을 경험하며,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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