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 11-17절
11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대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일반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의도하는 것은 사실 죽은 아이가 살아났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본문에서 고백되는 이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되는 내용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죽은 아이처럼 살아나는 기쁨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가 기적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지금 베풀고 계시는 예수님께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예수님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많은 사람이 하는 고백보다 사실은 더 뛰어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면서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즉, 우리가 큰 선지자를 보았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 기적의 중심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린다면, 사실은 지금 이 군중보다 더 우월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었던 아이가 경험했던 영적인 경험을 우리도 했다고 고백하게 되고, 이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되고 놀라운 간증이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좀 다른 각도에서 봤으면 좋겠습니다. 11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후에"라는 것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친 후를 말합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죽을 뻔했었던 하인이었지만, 오늘은 죽은 아이입니다. 병적으로만 이야기한다면 상황이 좀 더 심화된 것이죠. 이는 지금 백부장의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백부장과의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결국 저희가 지난 몇 달 동안 살펴봤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다음에 평지설교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지설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두 사도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민족을 지금 세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평지설교를 통해서 새로운 나라의 원칙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원칙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그 원칙에서의 복과 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 원칙들은 사실 세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저희가 발견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칭찬받고 부유하고 인정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데, 지금 예수님의 새로운 나라에서는 오히려 그와 정반대되는 가난한 자, 배고픈 자, 우는 자, 버림받은 자가 복되다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죠. 이 원칙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원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새로운 나라의 원칙이 어디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습게 여겼고, 전혀 하나님의 민족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지금 하나님의 원칙과 은혜가 확장되고 있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확장성이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왜 하필 과부일까?"라고 우리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성경에 보면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 살아나는 사건들이 꽤 많습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엘리사를 통해서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일들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이 과부라는 시대적 상황이 현대의 싱글맘과는 좀 다릅니다.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싱글맘들도 힘들지만, 이 당시에 과부는 사실상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계급으로 얘기하면 과부는 가장 밑바닥의 소외되고 힘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오는데, 그를 ‘한 어머니의 독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독자라는 의미는 한국적인 개념에서도 무척 중요합니다. 나의 유업을 이을, 내 가문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셈이죠. 그런데 이 독자가 능력 있는 사람의 독자가 아니라 과부의 독자입니다. 옛날 한국 사회에서는 딸을 시집보낼 때 가장 꺼리던 것 중 하나가 홀어머니의 아들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 과부의 독자는 과부에게 자기 생명과도 같이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아들이라기보다 오히려 나의 분신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존재의 의미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한 과부와 너무나 유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르밧 과부입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대척점에는 아합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 아합이라는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 나쁜 왕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으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정반대로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일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아합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세벨이라는 왕비가 있었죠.
결국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배교하게 하는 일이 바로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을 보면, 이 엘리야라는 사람은 장차 올 메시아의 그림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라고 했을 때 다윗 왕이 다시 오는 것도 생각했지만, 선지자적으로는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던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인데, 그 배교를 대표하는 아합과 이세벨 왕비의 대척점에서 그들을 비판하고 정죄했던 엘리야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앞으로 3년 반 동안 가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엘리야는 도망을 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날라다 주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거처하던 시내까지 다 마르게 되자, 엘리야는 시돈 땅으로 옮겨갑니다. 바로 이 시돈 땅이 사르밧이라는 곳입니다. 사르밧 과부라는 의미는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놓치는 것이 있는데, 시돈 땅은 이세벨의 고향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땅은 배교의 중심지이자 아세라 신을 섬기는 곳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백성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배교의 정점에 달해 있고, 엘리야 선지자는 도망가서 적군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적군의 중심부에 들어가서 그들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할 텐데, 오히려 지금 사르밧 과부를 만나는 과정 속에서 엘리야가 부탁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떡, 즉 중동지방의 '난'을 달라고 하자 사르밧 과부는 "나에게 남은 것은 딱 하나 만들 분량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 하나 만들어서 내 아들과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과부라는 존재는 시대와 장소를 떠나 이렇게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그러지 말고 일단 내놓아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과부가 만들어서 드립니다. 그다음은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통 안에 있던, 난을 만들 수 있는 가루와 기름이 그치지 않습니다. 은혜가 일어난 것이죠.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했더니 그런 은혜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병이 위중해져서 죽게 됩니다. 열왕기상 17장 17절부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모든 게 해결된 줄 알았는데, 아들이 죽어버렸으니 떡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살려놨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에게서 아들을 받아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으로 올라가 자기 침상에 뉘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며 엘리야도 동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엘리야도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과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리가운데 큰 선지자가 일어났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큰 선지자'는 바로 엘리야를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즉, "우리 가운데 엘리야가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르밧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죠.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와 지금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릅니다. 과부가 처한 상황은 비슷합니다. 오늘 이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사르밧 과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궁핍한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본문을 평지설교와 연관 지어 이야기한다면, 이 과부야말로 복 받는 사람 중에서 첫 번째로 얘기하는 '가난한 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어떻게 복을 받는지를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해주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것은 애통함입니다. 과부만 우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지금 함께 울고 있습니다. 즉, 복 받는 사람의 내용 안에 이 과부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르밧 과부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일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자기 몸을 죽은 아이에게 엎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하는 행위적인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본문을 오해해서 누군가 죽으면 내 몸을 펴서 엎드리는 그런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엘리야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13절부터 보시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십니다. 관에 손을 대는 행위는 엘리야가 몸을 엎드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행위적인 부분에서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했던 것처럼 만지는데, 다른 점은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그가 일어났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사르밧 여인의 사건과 지금 이 사건이 이런 부분에서 다를까요? 바로 여기서 예수님이 누구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앞서 얘기했듯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이기에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누가복음 7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세상 무리들이 이 기적을 보고 '큰 선지자'라고 말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다윗 왕 같은 또 다른 인간의 왕을 세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이루시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언약을 맺으셔서 이끌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기적을 베푸시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곧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청년아, 일어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지자 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되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신 분이 가난한 여인을 통하여, 애통해하고 있는 여인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13절의 표현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가고 계시다가 우연이든 의도되었든 한 무리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성경은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은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인 것 같습니다. 이 복음의 원리는 세상의 원리와 어긋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놓치는 부분이 바로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해지는 것을 거룩해지는 것으로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축복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오해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복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평지 설교에서 복 있는 자는 결국 가난한 자, 우는 자, 배고픈 자,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버림받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 나라의 원칙은 그 백성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존재라는 것, 여러분 인정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실은 어렵고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해서는 '맞아'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 인생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당당하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일 때가 참 많습니다. 이 땅의 삶 동안에 내 연약함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결국 불쌍히 여김을 받는 시작점이라는 것을 저희가 고백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죽은 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이 이야기를 듣던 당시의 나인 성 과부도, 살아난 아이도, 심지어 이것을 목격한 제자들도 이 의미를 온전히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지금 2000년이 지난 후에 저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이 사건의 의미를 더 온전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우리가 바로 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처럼 죽었던 존재라고 고백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과 떨어져서 죽었던 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일을 해서 죽었던 영혼,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던 자리에서 옮겨진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와 주신 것이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움직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게 되었고,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간증 아닙니까? 이것보다 더 어떻게 설명을 하겠습니까?
바로 그 가장 시발점이 어디냐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신앙에서 우리가 세워야 할 반석은 어디일까요? 평지설교에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너희가 어디에 집을 세울 것인가? 흙 위에 세울 것인가, 반석 위에 세울 것인가?" 저는 반석 위에 세운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가, 내가 어떻게 예수를 주라 고백했는가 하는 그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건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 일들을 얻어냈나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경험도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신 것이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기적이 일어나면 다들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는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기적을 기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먼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적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기다리고 계십니까? 로또 맞는 기적을 원하십니까? 내 질병이 놀랍게 고쳐지는 기적을 원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원하는 기적보다 더 우월하고 영원한 기적, 정말 기적 중의 기적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고백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만약 그것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기적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신앙의 태도가 달라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내용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덧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르밧 과부가 경험했던, 끊어지지 않는 기름과 통 속의 가루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만나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통과 기름이 컸을까요, 작았을까요? 저는 작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오늘 푸고 나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꽉꽉 담아주시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다음 날 통을 열어보니 꽉 채워진 것이 아니라 딱 하나 만들 정도만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가뭄이 끝날 때까지 일어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만나의 원리이지 않습니까? 그 만나의 원리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있다는 고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그 긍휼하심의 경험이 있다면, 그 다음 내 인생이 다르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금 내가 가진 소유가 불만족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말도 안 되는 불행일 수 있고, 내 건강이 말도 안 되게 헤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유업을 소유한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 땅에서 가진 것으로 말미암아 만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 황폐해진 건강을 통해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는 만나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말하는 그 불행조차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붙잡고자 하는 만나로 변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지 설교에서의 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정말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복이고, 굶주려도 복이고, 내가 울어도 복이고, 버림을 받아도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기적을 경험한 자입니다. 세상에서 바꿀 수 없는 기적, 기적 중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면 결국 내 모든 평범한 삶조차도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좀 심각한 질문을 던지면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지금 정체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적으로 지금 침체기를 걸어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해결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가장 위대한 기적으로 돌아가십시오.
우리에게 처음 주어졌던 그 기적, 처음이며 완전한 기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 사실, 내가 천국 시민 되었다는 그 사실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유일한 반석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과부가 경험했던 놀라운 기쁨을 우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성도의 이야기이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임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가정과 하나님의 공동체와 이 땅의 모든 교회가 그것으로 감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 거하는 모든 백성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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