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43-45절
43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가을입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 추수하는 계절이기도 하죠. 여러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씀 잘 알고 계시죠?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 저희는 그러한 원리가 원칙이 되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걸 원하십니까? 세상의 원리나 과학적인 원리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에서 콩 심으면 콩이 나고 싶으세요? 팥 심은 데 팥이 나기를 원하세요? 여러분의 인생과 신앙생활에서 뿌린 대로 거두고 싶으십니까?
정말 솔직한 마음은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가 잘 살펴보면, 이 열매를 맺기 어려운 신앙생활을 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정말 소원하는 것은, 뿌린 대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불로소득처럼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 것이 저희의 속마음인 것 같아요.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열매, 결실,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결과를 보면 그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오늘 약간 다른 안경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눈으로 이 말씀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누가복음 5장과 6장을 설교하면서, 특별히 6장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다음에 복과 화를 선포하신 것을 '새 나라의 원칙'이자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따른 선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을 그런 새로운 시대의 원칙이라는 시작점에서 보는 관점도 있겠지만, 저희는 이 모든 이야기가 완결된 상황에서 읽고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을 때 우리가 이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가지를 함께 봤으면 좋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을 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것을 여러분이 오늘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고 계셨을지 한번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자, 못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는 누구일까요?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는 누구일까요?
지금 예수님께서 평지 설교를 하고 계십니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모였단 말이에요. 그 가운데는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병을 고치러 온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대체 어떤 사람인가 관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훗날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자, 이들 가운데 좋은 나무,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쁜 나무,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5장과 6장을 보면 한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부류를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나세요? 꽤 오래전이라 기억을 못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재미있게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비벼 먹는 일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와서 지적하는 일들, 그리고 세리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 그 집에서 잔치를 열었을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랍비가, 어떻게 선생님이 이러한 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라며 비판했던 것을 살펴볼 수 있어요.
분명히 지금 이 상황에서 스스로 좋은 나무라고, 좋은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룹이 있단 말이에요. 그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종교적인 지도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고 하고,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여러 학문적으로나 모든 것이 뛰어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거죠. 그런데 또 한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좇는다고 하지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것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선포하고 계시죠? 누가 말씀하고 있죠? 예수님이 하고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나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가치관과 동일하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겠죠.
그런 의미에서 본문을 잘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다"는 얘기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요? 바리새인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는 것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걸까요? 역시 바리새인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들을 지목하면서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옛 시대에는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하는 율법적 자기 의가 옳다고 여겨졌지만, 그것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원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거죠. 여기서 문제는, '제자들에게 올바른 열매가 맺어지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른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처럼 이 땅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실 겸손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로 이야기하면 항상 죄의식이 좀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열심히 해도 늘 부족함을 느껴요. 여러분,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왜일까요? 마르틴 루터가 늘 그것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구원의 확신을 얻는데, 마르틴 루터는 늘 고민했어요. 아무리 하나님 앞에 열심히 그 인생을 다 바치고 수많은 고행을 해도 늘 부족함을 느꼈던 거죠.
늘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늘 울었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르틴 루터에게 로마서는 사실상 자기 모든 신앙의 전환이었고, 거기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알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실 우리들은 다 동일하게 마르틴 루터와 동일한 감정과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리고 사실 우리 열심히 하지 않잖아요. 사실 우리 그냥 그렇게 살잖아요. 그러니까 더더욱 주일만 되면 왠지 두렵고 떨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게 뭔지 아세요? "여러분, 죄인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게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 느껴야 할 가장 큰 몫은, 저는 개인적으로 은혜의 기쁨, 하나님께 드리는 놀라운 감사와 영광인데, 대부분 우리는 계속 "너 잘못했지, 너 잘못했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쪼그라들고, '내가 구원을 받았나, 안 받았나' 하는 두려움 속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 저희가 예배를 통해 죄를 고백할 때까지는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배 순서상 죄 용서함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어떡해야 할까요? 그 두려움이 없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감사와 긍휼하심과 그 은혜,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배가 기쁨이 넘쳐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나 어떡해. 내가 정말 구원받았나?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이러고 있습니다. 왜요? 좋은 열매를 내보이라고 하면 여러분, 내보일 자신이 없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맺는 열매가 다 못된 열매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나는 좋은 나무가 아닌가?' 이걸 우리는 구원과 직결시키잖아요. '좋은 나무여야 구원받고, 나쁜 나무면 찍혀서 불에 태워져 버림받는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난 구원을 받지 못하나? 난 천국 못 가나?'라고 우리는 자연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께 격하게 동의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맞다고 그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생각 속에는 누가 떠올랐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바로 저 녀석들 얘기하는 거야. 아니, 예수님이 왜 그들과 함께하시지?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잘 알아듣고 우리가 더 열심히 예수님을 정말 잘 섬기고 그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을 텐데'라고 아마 바리새인들은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이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이 이야기는 바로 제자들의 이야기겠죠. 그렇다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못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는데, 제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못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못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고야 말 것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해요? 문제는 우리가 못된 나무인데, 지금까지 못된 열매만 맺던 못된 나무인데, 어떻게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런데 문제는 뭐예요? 우리는 어떤 가지죠? 원래 있던 나쁜 나무에서 잘려서, 예수라는 나무에 접붙여진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나무에 접붙여졌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가장 완벽한 나무, 가장 영생을 줄 수 있는 나무, 그 나무에 접붙여진 자에게는 이제 무엇이 맺힐 수 있는 거예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항상 결과만 생각하잖아요. 우리 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뭐냐면, 접붙여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었던 가지가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받아서 살아나야 한다는 거예요. 전혀 다른 원리와 원칙에 살았던 자들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원리,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그 신비와 기적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의 구약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아시죠?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십니다. 자,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누구였다고 했죠? 우상을 만들던 자예요. 다른 말로 얘기하면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떼어다가 가나안 땅으로 옮기시면서 뭐 하시는 거죠? 하나님 앞에 접붙이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서 열매를 맺는 때가 언제죠?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치는 때입니다. 그런데 12장에서 22장까지는 수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인생을 한번 볼까요? 아브라함에게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은 적이 있나요? 저는 없는 것 같아요. 늘 실패, 늘 좌절, 하나님의 약속을 웃기도 하고, 순종하지 못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고... 여러분, 실패의 연속인데, 아브라함은 어디에 접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접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어떤 열매를 맺는 겁니까? 이삭을 바치는 열매를 맺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얘기하죠? 기적이에요, 여러분.
그 기적이 어떻게 일어나냐면, 오늘 본문 45절에 이렇게 얘기해요.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그래서 재미있는 표현이 뭐냐면, 마음의 선이 쌓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내가 무언가 해서 선을 쌓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우리 마음의 선을 쌓아주시는 거죠? '선'이라는 건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신 것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하시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여기에 주어는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들을 하나하나 쌓으시는 겁니다. 어떻게? 실패를 통해서, 좌절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하나하나 쌓아가다 보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이삭이 죽을지라도 이삭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 기적은 누구의 기적이 되는 겁니까? 누구의 선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의 선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공로의 결과물이 아니라 기적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그의 삶 속에서 많은 선을 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제 인생 속에서 아브라함 같은 기적을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 말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을 읽었을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그것을 통해서 '와,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이다'라고 얘기하잖아요. 우리 인생 속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거라는 겁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으니까요.
그런데 접붙여졌다는 건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이게 아브라함의 인생에만 일어났나요?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일어났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 되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찾았나요? 안 찾았어요, 여러분.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귀히 여겨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거기서 그냥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떼어내서, 거기 있으면 안 되니까 거기서 떼어내서 잘라서 어디로 옮기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는 겁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이야기하시면서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땠나요? 하나님을 찾았을 때 열심히 따랐나요? 온전히 따랐나요? 안 따랐어요.
구약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선택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다른 신들,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는 내용이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게 은혜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열매 때문에, 아니, 열매를 아예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답답하십니까? 그럼 제가 질문할게요. 그 답답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여러분, 그 답답함은 내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으면 그 답답함은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열매가 안 나는데 굳이 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세요? 굳이 예배하러 왜 오세요? 그게 아직도 하나님 앞에 이끌리고 있다는 거예요. 자의든 타의든, 억지로든 자발적이든 말이죠. 여러분, 교회에 나오는 것을 너무 쉽게 여기시는 것 같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 느끼는 약간의 죄책감, 내가 하는 것들을 너무 쉽게 여기지 마세요. 그거 정말 어려운 겁니다. 왜요? 세상은요, 쳐다보지도 않아요.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있으면 찾지도 않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찾는다는 것 자체, 눈을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자체가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열매 때문에 답답해하십니까? '내가 이렇게 뿌렸는데, 내가 일평생 하나님을 좇아왔는데, 내가 이런 직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섬겼는데 왜 나에게는 이 코딱지만 한 열매가 있는가? 아니면 내 열매가 왜 이렇게 맛이 없지? 왜 내 열매는 이렇게 보기 흉하지?'라고 답답해하십니까? 여러분,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무엇을 이룬다고요? 선이 나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그만큼의 열매가 필요할 때예요. 그 일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접붙이신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뭐냐면, 나에게 그만한 열매라도 맺게 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나에게 그나마 주신 그 은혜, 그것 때문에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는 너무 쉽게 좋은 열매를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소비자 입장에서 누군가 그걸 재배해서 가지고 오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죠. 그러나 농부가 되면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열심히 했는데 1년이 지나면 뭐가 나나요? 3년이 지나면... 먹을 때까지 어떤 건 10년이 되고 어떤 건 3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도 보잘것없고, 어떤 해에는 병충해가 와서 하나도 못 먹게 될 수도 있고, 그런 일들이 다반사거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 속에서 그런 일들, 그것조차 하나님께 감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만 감사하는 게 아니라, 이게 참 재밌는 게요, 저는 모두가 같은 점에서, 우리가 자동차는 모든 실린더가 똑같이 가야 모든 파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교회 공동체를 보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실린더로 가는 것이 항상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가 다 같은 힘으로 같이 은혜받고 가자고 해서 교회 공동체가 부흥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우리는 각각 각기 다른 열매를 갖고 있습니다. 이걸 교회 공동체에만 국한하지 말고, 가족에서도 보세요. 우리 가족에서도 누군가는 은혜받고, 누군가는 좌절하고, 누군가는 열매를 맺고, 누군가는 병충해 때문에 그 열매가 썩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족이니까 내가 열매 없어도 남의 열매로 먹고사는 거예요. 가족이니까 서로 힘들어도 다음 내년에 주실 그 열매를 소망하며 이기고 견뎌가는 거예요. 가족이니까. 그렇잖아요. 우리가 다 그렇게 일평생을 살지 않았나요? 특히 이민 1세대는 다 그러면서 자녀들을 키우면서 살아왔어요. 가족이니까. 가족만을 보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족의 개념을 교회 공동체로 옮기면 딱 맞아떨어져요. 우리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아름다운 열매가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것이 되는 겁니다. 같이 나눠 먹는 거예요. 왜요? 내가 다음에 병충해 때문에 나에게 소산이 없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공동체로 부르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열매를 함께 공유하고 따 먹게끔 만들어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한번 좌절하고 절망하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는 열매를 맺지 못해도 내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공동체가 그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44절에 보면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동체에서는 그리스도의 열매를 따는 거예요. 세상의 열매를 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열매는 완전한 열매가 아니라 완성되어져 가는 열매입니다. 세상의 열매는 재미있게도 아름답고 완성된 것들로 자랑해요.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열매는 자꾸 보잘것없는 것으로 자랑해요. 서로의 열매를 나의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 그래서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자랑하고, 가진 것으로 교만하고, 가진 것으로 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으로 자비로움을 베푸는 일들, 서로에게 나누어주는 일들, 그것이 올바른 가정의 모습이고 공동체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론을 이야기하면, 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결과 중심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결과는 딱 하나입니다. 결과 하나가 뭘까요? 영생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똑같은 결과입니다. 우리 인생의 끝의 결과는 영생이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결과가 중심적일 수가 없어요. 안 그런가요? 너무나 똑같은데, 누구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결과가 똑같다면 그게 왜 우리에게 그렇게 큰 차이점이 되어야 하나요?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결과가 똑같다면, 중요한 건 뭐냐면 그 결과를 이루는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열심, 여러분의 능력, 여러분의 자랑으로 이런 결과를 맺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자비하심으로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중요한 건 뭐냐면, 원인으로 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다음 주에 그 원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반석이심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음 주 본문이 우리에게. 중요한 건 뭐냐면, 그런 원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열매를 맺는 과정에 사는 거죠. 1년 차의 과정, 2년 차의 과정, 3년 차의 과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그럴 수도 있어요. 내 인생 자체가 정말 계속해서 조금 보잘것없는 열매만 맺을 수밖에 없는. 왜요? 내가 황량한 길거리에 뿌려진 씨앗이니까. 놀랍게도 그 길거리에 뿌려진 씨앗에서 열매를 맺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놀라운 기적 아닙니까? 우리는 오해하는데, 예수님께서 옥토에만 뿌린 것이 아니라, 구약적인 개념으로 얘기하면 옥토는 어디죠? 이스라엘,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에게만 그 씨를 뿌렸던 게 아니에요. 이방인 길가에도 뿌리고, 가시덤불에도 뿌리고, 우리 같은 이방인들, 정말 개보다도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씨를 뿌렸는데, 바리새인들 보기에는 거기에는 나무가 자랄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나무가 자라더니만 어떻게 해요? 열매를 맺더라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그게 기적 아닙니까? 내게 조그만 열매를 맺더라도, 그 열매를 맺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인생이 의미가 있고,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거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왜요? 결과만 보니까, 그 결과를 다른 것과 비교하니까, 세상을 보니까.
그래서 중요한 건 뭐냐면, 우리가 마지막 결과를 얻기까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간, 순간이 감사와 기쁨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와 기쁨이 나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서도 풍성히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하사랑 공동체에서도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서로가 비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은혜의 눈으로 보게 되는 거죠. 왜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니까요.
그런데 맹인들은 그걸 못 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자는 맹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빛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경으로 이 세상을 보게 되는 거죠. 세상에서는 부자 되고 세상에서는 명예로운 일들이 열매라고 얘기하는데, 그리스도의 안경으로 보니까 낮아짐으로 가는 것이 영광이 되는 겁니다. 내게 돈이 없어도 기쁜 거예요. 내 건강이 좀 힘들어도 그냥 이겨낼 수 있는 기쁨이 나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세상을 보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세상을 보면 바보짓이고 호구짓인데, 거기에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저는 이 하사나 공동체가 그런 걸 좀 발견하고, 그걸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왜요? 그것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열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쉽지 않습니다. 접붙여진다는 건 쉽지 않아요. 잘려졌다는 거거든요. 내게 편했던 것들이 잘려지는 거예요. 내가 갖고 있는 안락한 곳(comfort zone)에서 나오게 만든다는 거예요.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을 때, 처음에는 잘 모르는데 거기서 나오는 생명의 공급이 나로 하여금 그 아픔을 잊게 하고 회복하게 하고, 그리고 그 회복이 나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게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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