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46-49절
46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건축가가 나와서 아름답고 독특하게 지은 집들을 둘러보며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가끔 봅니다. '어떻게 저런 집을 지었을까?' 우리는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됩니다. 어떤 기능을 갖추었는지, 어떤 외관을 가졌는지, 혹은 어떤 건축 공법을 사용했는지 등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늘 '어떻게', '어떤 모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집을 짓고 싶으십니까? 지금 살고 계신 집은 여러분이 꿈꾸던 바로 그 집인가요? 더 나아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여러분의 삶을 어떤 모양의 집으로 짓고 계십니까? 그리고 우리 하사나교회 공동체는 지금 어떤 모습의 공동체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어떤 모양의 건물을 지을 것인가'라는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 사고의 전환을 이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에'** 집을 지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평지 설교'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새 나라가 어떤 원칙과 원리로 세워질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복과 화를 선포하신 후, 오늘 본문으로 설교의 대미를 장식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 굳건히 서야 하며,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떤 집을 지을까'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우리는 지난주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짓는 집의 모양은 결국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은 그 원리를 뛰어넘습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고, 팥을 심었는데 콩이 나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결국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열매를 맺는 원천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나무에 우리가 접붙여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이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며 작은 열매를 맺고, 마침내 내 노력과 상관없는 기적 같은 좋은 열매를 맛보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가 확인했던 바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원천, 그 반석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운 집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플로리다 지역이 허리케인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는 것 같습니다. 태풍이 불면 집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현실적인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튼튼한 집을 지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더 단단한 땅을 찾고, 더 튼튼한 자재를 사용하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합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질책하듯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47절에서는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누구와 같은지를 보여주시겠다고 합니다. 그 예시가 바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흙 위에 지은 집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 집 모두가 마주해야 하는 '환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새로운 나라, 복된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아름답고 평온한 환경을 보여주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본문이 보여주는 환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 지었든 못 지었든, 두 집 모두에게 **'탁류(濁流)', 즉 거센 홍수가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나라에서조차 우리 인생에는 환난과 고난이라는 탁류가 부딪혀 온다는 사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이 평탄해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고난의 세상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탁류가 덮쳐올 때, 진정으로 복된 삶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탁류가 왔을 때 무너져 버리는 삶, 즉 '흙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의 설교 전체 맥락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선포하셨던 대상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배부른 자여." "화 있을진저, 지금 웃는 자여." "화 있을진저,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여."
이것이 바로 흙 위에 지은 집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유해지기 위해, 배부르기 위해, 웃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인생의 집을 지어왔습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단단한 기초 위에, 최선을 다해 지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세상의 성공이라도, 탁류 앞에서는 하룻밤에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쌓은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반면,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일까요? 그 반석은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구원의 기초가 되어 주시기 위해, 그분 자신이 반석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반석 위에 지어진 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사람들은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핍박받고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판잣집과 같습니다. 화려한 대궐 같은 흙 위의 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탁류가 덮치자, 대궐은 무너져 내리고 판잣집은 굳건히 서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집의 화려한 모양이 아니라, 그 집이 서 있는 **반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판잣집 같아도 만족하십니까? 세상의 기준에서 보잘것없어 보여도 괜찮으십니까? 우리는 쉽게 "예"라고 답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초라함을 느끼고, 행복한 가정을 보며 우리 가정을 탓하며 끊임없이 좌절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46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너희'는 바로 복을 약속받은 제자들, 즉 오늘날의 우리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죄책감에 빠뜨리기 위한 질책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우리를 향한 강력한 **도전이자 격려**입니다. "이제 입술의 고백에만 머무르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준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내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47절은 세 가지 단계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1. **예수께 나아가는 것:** 우리의 삶에 고난이라는 탁류가 덮쳐올 때, 내 힘으로 맞서 싸우려 하지 말고 가장 먼저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나라 백성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2.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 세상의 소리, 내 안의 목소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내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약 그것이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쩌면 흙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3. **말씀대로 행하는 것:** 예수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행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모든 것이 사라진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담대한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삶의 작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던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그러했다면,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더욱더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서 있다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원리는 우리 공동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세상의 조직은 모든 부품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최대의 힘을 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이나 교회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의 관점입니다. '어디에'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 공동체는 모든 실린더가 완벽하게 돌아가는 엔진이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파하고, 누군가는 지쳐 쓰러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이,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통로가 됩니다. 누군가의 아픔이 우리 공동체가 서 있는 반석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주여, 주여"라는 입술의 고백을 넘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 하사랑교회 공동체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어떤 환난의 탁류가 몰아쳐도 굳건히 서 있는 반석 위의 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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