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39-42절
39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사랑의 매를 맞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사랑의 매를 행사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저는 부모님께 사랑의 매를 맞은 기억은 저는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사랑의 매’라고 말씀하시면서 폭력을 행사하셨던 기억은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교회 생활을 할 때, 교회 선배들이 옥상으로 불러내 ‘사랑의 매’라며 열 차례를 때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매’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사랑의 매’라는 것은 참 말이 안 되는 묘한 표현입니다. 사랑과 매,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냐면, 우리는 사실 약간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희는 지난 시간 복과 화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여러분은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가 사랑의 매라고 맞긴 했지만, 그 매에 정말 사랑이 담겨 있었을까요? 우리가 그것을 분석하고 동의하면서 맞았을까요? 어떤 분들은 마음이 착해서 ‘아버지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해서 때리시는 거고, 나 잘되라고 때리시는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 우리가 자녀를 꾸짖을 때를 돌아보면, 사랑보다는 내 안의 화와 분노 때문에 그럴 때가 참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가 경험한 것을 뛰어넘기란 상당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자비’라고 표현하는 것들에는 우리 각자의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의 매’로 표현했던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정에서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어떻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 남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경상도 남자는 사랑 표현을 잘 못 한다고들 합니다. 비단 경상도 남자만 그럴까요? 저는 저희 부모님 세대의 대부분 한국 남성들이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밖에 나가서 열심히 돈을 벌어 가정을 책임지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었던 시대를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부모님 밑에서 자라난 저희 세대는 사실 보고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답은 듣게 되지만, 내가 경험한 것과 정답 사이에 괴리감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옆집 친구나 다른 사람들을 보며 ‘아버지상이 참 좋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지식적으로, 간접적으로 본 것과 실제 본인들이 경험한 것이 부딪혔을 때 무엇이 더 큰 영향력을 주는지 아십니까?
실질적으로 경험했던 것이 더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저희가 자녀를 키울 때도 분명히 자비함과 긍휼함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것이 참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도 그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자비(mercy)’라는 단어에 익숙하십니까? 자비라는 것을 언제 경험해 보셨습니까? 가정에서 자비로움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가정에서 자비로움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세상에서는 자비로움을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자비로움이 용납되지 않는 경쟁 사회였고, 성공 지상주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복과 화에 대한 이야기,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저는 이질감을 느낍니다. 설교하는 저도 답답한데, 설교를 듣는 여러분 속에도 답답함이 있지 않으신가요? ‘나더러 어떡하라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복되다고 하는데, 나는 부자 되기를 원하고, 배부르기를 원하고, 웃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데, 자꾸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면 화가 있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사실 어떻게 가난해져야 하는지, 어떻게 배고파야 하는지, 어떻게 주려야 하는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어떻게 버림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냉철하게 얘기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무언가를 쟁취하고 얻어내고 인정받는 방법입니다. 세상이 그것을 너무나 잘 가르쳐주고, 세상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와 진리인 양 행세하며 이미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런데 ‘가난해져라, 주려라, 울어라, 버림을 당해라’ 이 단어들에 익숙하신가요? 설교하는 저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를 드십니다. 맹인 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맹인이 되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맹인이십니까? 문자적으로 우리가 전부 맹인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드셨을 때 우리는 비유적으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세상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보라고 요구합니다.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정확히 볼 것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고, 칭찬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잘 봐야 배부를 수 있고, 잘 봐야 웃을 수 있고, 잘 봐야 행복할 수 있다고 세상은 얘기하고 교회에서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야 복을 받는다고 얘기하잖아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잘 봐야 우리는 성공할 수 있고 축복받을 수 있다고 우리도 얘기합니다. 심지어 성경을 잘 읽어야 한다고, 잘 봐야 하고 잘 적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볼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오늘 설교의 제목을 ‘비판하지 말라’로 정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비로운 자가 되라’로 바꿨습니다. 설교 제목이 바뀐 이유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근본적으로 행위적인 측면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쉽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다른 사람 험담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도 도덕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원인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이라고 얘기하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비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비로운 자이십니까? 아니, 자비로운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사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자비로운 자가 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호구’가 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비로운 자가 되자’는 말 자체는 너무 멋있지만, 실질적으로 여러분이 세상에서 살게 되면 자비로운 자가 되는 순간 ‘호구’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자비와 우리가 말하는 자비가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그저 이용해 먹으려는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서만 일어날까요? 저는 현재 살아가는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비로운 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 힘 없는 사람, 공동체에서 영향력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현재 교회의 냉철한 문화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자비로운 자가 되어서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큰 틀이, 제가 계속 얘기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옛 시대의 가르침, 즉 율법의 가르침이 익숙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 익숙한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옛 시대에서는 율법의 원칙에 따라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화를 받았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적’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이 길이 잘못된 길이야. 뭐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이쪽 길로 가라." 계속해서 지적합니다. ‘지적질’이라는 뉘앙스가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좋은 것입니다. 길을 알려주는 것이니까요. "이 길이 맞습니다. 이건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십시오. 이 길로 가면 축복받습니다." 그러니 너무나 쉽습니다. 그대로 따르면 되니까요.
한국 교회에서 율법주의적인 교회를 다니셨던 분들은 신앙생활하기가 편합니다. 하라는 대로 하면 되니까요.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라는 것을 하면 축복받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저주받으니까 공포감이 생겨서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옛 시대의 원칙,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옛 시대의 원리를 뒤바꿔 버리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새로운 원칙을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원칙에는 어떤 원리가 들어가냐면, 애통해하고 가난하고 주리고, 즉 본인의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옛 원리, 구약의 원리는 법을 지키도록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하라, 하라. 지켜라, 지켜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난데없이 그 원리를 뛰어넘어 "너는 부족함을 인정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의인 됨을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나는 의인이요, 나는 지금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고 있어."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팔아먹는 거짓 선지자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원칙은 "너희가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맹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볼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 맹인이 맹인을 끌고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율법, 즉 구약으로는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정말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을 그냥저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었나요? 구약 성경에서 끊임없이 증거되었던 것은 인간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 즉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고백해야 하는데, 스스로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고 서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지켰을 때,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이 지키는 것,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로 만들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낡은 무대에서 잘못된 종교 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새로운 부대에 담을 때다"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원수를 사랑했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나요? 제가 지난주 설교의 요점은 원수가 누구냐가 아니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목회자 모임에 가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성도님들이 설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제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제 설교의 의도는 여러분이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목사님들조차도 "내가 아내를 더 사랑해야 하나요?"라며 원수만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본질적인 의도를 놓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누가 원수냐, 그 원수를 찾아서 내가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원수를 사랑하신 분이 누구시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 누구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신 그 예수님께서 나를 품고 원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품고 율법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나에게 축복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39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여기서 우리는 눈먼 자, 즉 제자가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온전하게 되면 선생과 같아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스스로 온전해질 수 없는 우리를 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하는 힘의 근거가 어디로부터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지려는 우리의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36절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너희가 노력해서 자비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맹인이 눈을 뜰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우리가 우리의 들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고백해야 할까요? 내가 맹인 됨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병자임을,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의인을 위함이 아니요, 건강한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하여, 죄인을 위하여 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인정, 아주 근본적인 단계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음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아,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그럼 내가 어떻게 비판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행위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내가 정죄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정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행위의 유무를 따지는데, 그것은 구약적인 원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하나님의 새로운 법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옛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너 비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비판해?"라고 말하며 비판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비판을 할까요? 성경에서는 잠언서를 비롯해 비판하지 말라는 얘기를 너무나 많이 합니다. 왜 우리는 비판하고 사람을 정죄할까요? 제가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계속 고민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이러한 요구들을 현재 이 세상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요즘 한국도 그렇고, 인본주의가 강해질수록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공평’과 ‘상식’입니다. 공평과 상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공평과 상식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공평’과 ‘상식’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 근본적으로 원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항상 성공의 잣대, 성공의 장에서 공평과 상식을 얘기합니다. 성공하고 싶으니까요. 부자 되는 방법에서 공평과 상식이 요구되고, 우리가 잘될 때 공평과 상식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난해지는 것에 공평과 상식을 적용하나요? 우리가 핍박받는 데, 따돌림당하는 데 공평과 상식을 사용하나요? "누구나 다 공평하게 따돌림받아야 한다"고 사용하십니까?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생각하고 있는 공평과 상식은 다 잘되기 위한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가 왜 문제가 되냐면, 우리는 다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욕망, 즉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능력 없는 사람이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내게 힘이 있어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힘도 없는데 비판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비판이라고 여기지 않고 찡얼거린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힘 없는 사람이 정죄하면 상대방은 아무런 영향도, 부담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본은, 너희가 잘나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정죄할 자리에 있어서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원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나는 누구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의 내용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게 가능할까요? 여러분 눈에 들어간 것이 티인지 들보인지 아십니까? 문자적으로 들보가 눈에 들어갈 수는 없겠죠. 들보같이 큰 것이 들어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작고 크냐를 생각하지만, 둘 다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들보가 들어갔든 티가 들어갔든 그것을 인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 외식하는 자, 즉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맹인은 자기가 얼마나 못 보고 있는지 모르는 자입니다. 알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제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전부를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맹인일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것을 알지 못하는데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들보라고 얘기해도 나는 그것을 들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맹인 됨의 문제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맹인들의 공통점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들보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판하고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니까요. 맹인이 다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은 들보로 여겨지니까요.
이게 남의 일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고, 목사가 제일 잘합니다. 제가 제일 잘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도록 교육받고 훈련받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제가 성도를 볼 때도 자꾸 판단하고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저렇게 예배를 드리지?", "왜 저렇게 봉사를 하지?", "왜 저렇게 열심이 없지?" 시도 때도 없이 판단하게 됩니다. 제 본성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훈련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맹인으로서 본다면, 제가 받는 훈련은 모두 정당화됩니다. 저는 잘하고 있는 것이고, 제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실수는 너무나 커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가 먼저 맹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아,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구나’, ‘아, 내가 지금 내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구나, 하나님이 나를 눈뜨게 하신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판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위가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이제 나의 들보가 보이고, 내가 얼마나 무능하고 나약한지를 보게 됩니다. 내 나약함을 보게 되면 다른 사람의 나약함을 봤을 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처럼 그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나에게 임했던 동일한 자비하심이 그에게도 임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원칙과 논리에 대해 이해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갑니다. 우리는 내가 맹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거야"라고 비판하며 고치고 수정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면 그 판단의 기준에 누가 서 있는 것입니까? 바로 내가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설 자리를 내가 대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은 어떨까요? 그러한 가정에서 사랑의 원칙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한 가정의 아버지가 사랑의 표상이 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말에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녀가 있을 수 있을까요? 아내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 남편,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갈 때 그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아내가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단언컨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와 자비하심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국 그 기준에 나 자신이 서 있기 때문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꼴이 됩니다. 맹인 된 아버지가 맹인 된 아이를 인도하면 다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래, 우리 비판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자’ 이렇게 끝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것만 해도 대단한 교회이긴 합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꽤 괜찮은 교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바라봐야 할 지향점은 거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세상도 할 수 있는 일이고, 어쩌면 세상이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벌금을 매기고 원칙을 어긴 사람을 쫓아내면 그 공동체는 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일까요?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나 재미있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비판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정죄하는 자들에게 정죄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자비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준비했던 저도 오늘 아침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제가 아내를 위해서 아침에 라떼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남편입니까? 그런데 아내가 바쁘게 준비하느라 마시지 않기에 "왜 라떼 안 마셔?"라고 한마디 했습니다. 아내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바쁘면 갖다 줘야지."
그 말을 들으니 제 안에 아내를 비판하고 정죄하고 싶은 마음이 쑥 올라오는 겁니다. 왜요? 저는 아내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내의 말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뭘 해야 했을까요? 하나님을 바라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봤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그냥 거기까지 가져다주는 것이 맞죠. 그런데 저는 그 당시에 ‘내가 이렇게 아침에 당신을 위해서 해줬다’라는 생각만 하는, 나 중심적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저만 그렇겠습니까? 저만 그런 것처럼 쳐다보시면 제가 섭섭하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한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변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보십시오. 이 공동체가 변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티를 들보처럼 여기는 존재들입니다. 저는 이 땅이 끝나기 전까지 이 일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가정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해결 방법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결 방법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주신 일에 있고,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도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의 손길과 눈길과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 자비로우심 때문에 내가 회개하게 되고, 내가 용서하게 되고, 용서를 구하게 될 때, 바로 그것이 기적의 시작이고 은혜의 시작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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