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 18-23절
18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오늘날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이민 사회에서도 통계적으로 확인되는 사실로, 기독교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인 수는 왜 이렇게 감소하는 것일까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부흥하던 이민 교회 안에는 놀라운 성장의 역사가 많았습니다. 그때 교회를 다니시던 그 많은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사실 우리 주위에는 교회를 떠나 계신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그분들은 왜 떠났을까요? 가장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답은 교회의 분쟁이나 어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까? 고난과 억울함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들은 왜 떠났을까요?
저는 그들이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복음에 대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경험했던 분쟁과 억울함, 그 답답함보다 복음이 더 강력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그 나쁜 감정들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그 놀라운 기쁨이 과거의 상처를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그들은 왜 의심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저는 이 말씀을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실족했던 자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떠난 자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왜 실족하게 되었는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의심, 혹은 그 약속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세례 요한의 고민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았으면 합니다. 저는 의심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의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모든 의심과 고민을 뛰어넘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증명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증명되지 않는 것을 뛰어넘는 실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자의 고민과 실족하는 자의 고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 '의심'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문제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 즉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중요한 도구로 소개해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제자들을 부르시고 평지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선포하셨습니다.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를 통해 하나님 백성이 누릴 기쁨과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 겪게 될 경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두 주간 우리는 그 새로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이방인 백부장과 힘없는 과부의 사건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뜬금없이 세례 요한과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로 인정받는 시대가 있었고,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을 존경하고 동경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세례 요한보다 큰 자다"라고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가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세례 요한은 옛 시대, 즉 옛 언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모든 역사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옛 언약이 뛰어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신 새 언약의 시대는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고 중요합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칙 안에서, 세례 요한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작은 자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그는 새 언약의 원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비밀을 깨달아 압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요한보다 우월한 언약의 완성을 경험한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지만, 갇힌 상황 속에서 세상의 소문들을 들으며 확신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그에게 알렸습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란,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바로 직전에, 죽었던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했습니까?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큰 선지자는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엘리야와 같은 큰 선지자라고 말한다면, 세례 요한은 기뻐하며 "바로 이분이다!"라고 외쳐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는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 질문은, 그가 들었던 '모든 일' 속에 그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소식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세례 요한은 무슨 얘기를 들었던 것일까요? 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판했던 내용, 즉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재림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했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죄인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라고 믿었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꾸짖기는커녕 그들과 어울리신다는 소문은, 그의 신념을 뿌리부터 흔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의심의 질문을 가지고 찾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
무엇을 보고 들었습니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보고 들었던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세례 요한의 의심에 대한 답이 될까요?
바로 여기서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갈라집니다. 세례 요한으로 대표되는 옛 시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며 죄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며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에게 혼란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기적들을 통해 새 시대의 본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기적들은 단순히 신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모든 일은 '복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고, 바로 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주린 자, 우는 자, 버림받은 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나병 환자, 가난한 자, 못 걷는 자, 맹인들은 모두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고 울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이며,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참된 의미를 깨닫는 자는 결코 실족하지 않고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복을 거부하고, 부유해지기 위해, 배부르기 위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을까요? 교회의 싸움이나 상처도 이유가 되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복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자가 되라, 우는 자가 되라, 버림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교회 안에서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인 열심으로 배부르고 인정받으려 할 때, 현실이 기대와 다르면 상처받고 실족하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떠난 이들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는 다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실족의 근거를 마련해 줄 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듣는 경험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회복되고 우리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맹인이었던 내가 눈을 뜨는 것을, 걷지 못했던 내가 걷게 되는 것을, 나병 환자 같았던 내가 깨끗함을 받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죽었던 내가 살아나고, 복음을 들을 자격 없던 내가 그 은혜를 누리게 되었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직 이 경험만이 실족한 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교회 밖에서 실망하고 떠난 사람들에게, 우리는 세상의 지혜나 교리(사영리)로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정말 예수입니까,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까?"라는 또 다른 의심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복음,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하사나 교회 공동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장점을 자랑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전하고 싶습니까?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조금 낫다고 자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으로 실족한 영혼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보고 만질 수 있다는 고백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세상에서 나병 환자처럼 버림받았던 내가, 이 공동체에 와서 나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걸어주는 형제자매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멸시하는 가난한 자라도, 이 하사나 교회 공동체에 오면 그 인격 그대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받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실족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눈을 뜰 수도, 걸을 수도, 깨끗해질 수도, 살아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그분께서, 성령을 통해 불가능하고 버거운 그 일들을 우리 안에서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경험과 섬김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교회를 떠나 의심하며 방황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황폐해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그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합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그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아가는 이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설교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7장 11-17절 일어나라 (0) | 2025.09.20 |
---|---|
누가복음 7장 1-10절 백부장의 비밀 (0) | 2025.09.19 |
누가복음 6장 46-49절 내말을 듣고 전하는 자 (0) | 2025.09.18 |
누가복음 6장 43-45절 나무는 열매로 아나니 (0) | 2025.09.17 |
누가복음 6장 36-42절 자비로운 자가 되라 (0) | 2025.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