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 36-50절
36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이런 설교를 들으면 항상 왠지 마음의 부담감이 생깁니다. '얼마나 헌금을 하라는 얘기인가?', '얼마나 나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말인가?', '내 인생을 전부 다 드리라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쪽으로만 결론을 맺는다면, 사실 오늘 본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는 이유는 한 여인의 헌신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한 여인이 무엇을 바쳤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 결론적으로 찾아봐야 할 것은 '왜 이 여인이 이런 행동을 했는가?' 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의 문제가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즐거워하지 않고, 곡을 하여도 슬퍼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세대의 문제라는 것을 저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무슨 권위로'라는 질문입니다. '무슨 권위로 죄 사함을 하느냐?' 또 다른 질문은 '만약 선지자라면 이러한 사실을 알지 않았겠느냐?'라는 질문들입니다. 결국 무엇에 대한 질문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가 과연 선지자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바리새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입니다. 그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 갔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나 향유를 담은 옥합을 부어 예수님의 발을 씻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9절을 보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마음에 질문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고 말입니다.
지금 '만일 선지자라면'이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전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물었던,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우리가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복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은, 예수를 보고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당신이 인자입니까? 당신이 우리를 구원할 예수입니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여러분에게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당신이 믿는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당신이 믿는 예수가 당신을 구원할 자인가?', '당신이 믿는 예수가 과연 영생을 주는가?'라는 질문을 세상은 여러분에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떠한 답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니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보다 현대를 살아가는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현문우답(賢問愚答)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가 이 시대를,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현대를 살아가는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 가끔 우문우답(愚問愚答)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 믿으면 부자 돼", "예수 믿으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와 같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것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보다는 현상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거 했어, 예수가 저거 했어" 라고 하는데, 그 답이 그들의 질문을 해소할 수도, 그들의 갈증을 해소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왜 그러한 우답을 하고 있을까요? 결론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예수가 하나님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예수를 초대해 놓고서도 그 마음속에 '정말 이 사람이 선지자인가?'라는 질문이 있었고, 그것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신의 행동은 달랐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37절에 보면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표현합니다. 처음부터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여인이 죄지은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석가들은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일까?', '베다니의 마리아일까?', '간음한 여인일까?' 하며 수도 없는 해석을 하지만, 거기에 관심을 갖지 말고 일단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죄를 지은 자'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웬만한 죄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죄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구별된 자라면, 나실인이라면, 저 여인이 죄인인 줄 알았을 텐데.'
랍비나 나실인은 여인을 만지면 안 됩니다. 그냥 여인과 가까이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 여인이 부정한 여인, 즉 죄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 구별된 자들은 그 여인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것이 율법적으로도, 그들의 종교적 상식으로도 당연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라면 그 여인이 누군지 알 것이다'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안다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아이러니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허용하셨다면, 그 바리새인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죠?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 인생이 변한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메시아입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 있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다'라고 도전하며, 그를 죽이려고 하는 노력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을 저희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만났을 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를 메시아라, 인자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를 시험하고 그가 누구인지 관심은 있지만 결국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신성 모독하는 자라고 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그런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저희가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마음속으로 '아, 이 사람 선지자가 아닌가? 내가 괜히 불러왔나?'라는 마음이 들 때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십니다. 40절을 보면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시면서 비유를 드십니다. 41절부터 보면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고 합니다. 10배나 차이가 나는 큰 액수입니다. 갚을 것이 없어서 둘 다 탕감해 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둘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때 바리새인은 이 의도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답변합니다.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지금 의도적으로 '누가 더 사랑하느냐'를 이야기하시는데, 한편으로 저희는 이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바리새인 시몬은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에 의도적으로, 44절부터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말씀하십니다.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느냐?"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시몬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시험해서 이 여자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선지자인지를 구별했었고,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아느냐?"라고 되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따져 묻기 시작합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랍비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그 말 속에 나의 존경심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당신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대접합니다. 당신을 내 집에 초대했습니다.' 그는 뭔가 하고 있다고, 베풀고 있었고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에게 결국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면서 비교의 대상으로 이 여자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다." 왜 이 여자가 이런 일을 했느냐?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기 때문에 나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나를 존경한다고 말하고 환영하였지만 결국은 말로만 했을 뿐, 들어와서 환영의 입맞춤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내 발에 입 맞추었다." 여러분, 이 발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 더러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발을 감싸는 양말도 신고 신발도 신고 있기 때문에 발에 대한 거부감이 덜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온갖 먼지와 더러운 것들이 다 묻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입맞춤했다는 것입니다. 왜 입맞춤을 했을까요?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상한 적용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지자에 대한 질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누가 더 사랑하느냐'는 사랑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해 버리십니다. 그러면서 46절에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하십니다.
47절에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자, 누가 적게 사랑하는 거죠? 바리새인이 적게 사랑하는 거죠. 죄 많은 한 여인이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리는 "맞습니다"라고 하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인정이 될까요? 인정이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 이전에는 율법이 잣대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왔느니라"고 했을 때에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잣대로 봤을 때, 율법을 사랑했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이 여인, 죄 많은 여인은 오히려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쫓겨나야 하는, 한 밥상에서 교제를 나눌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시대의 원칙은 무엇이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잘하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잘하는 애에게 떡 하나 더 많이 준다'는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언가 잘하고 헌신하고, 더 크고 더 좋은 것들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하고 우리의 그 사랑의 표현들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핵심은 향유, 그 값비싼 향유, 값비싼 옥합을 가져왔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게 되는 거죠. 사랑의 잣대, 사랑의 기준을 내가 무언가 드리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조건은 내 죄가 얼마나 많은가를 깨닫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그 은혜를 오해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지난번에 저희가 살펴봤던 것처럼, 이 세대가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곡하여도 울지 않았던 모습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모습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선지자의 그 놀라운 능력들이 드러나고 메시아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를 시험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람이 선지자가 맞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해야 하는데, 기쁨을 나눠야 하는데,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우리는 다른 일들, 즉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들에 함몰되어 있지는 않은지 우리를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이 여인의 모습이 어떤 의미에서는 피리를 부는데 즐거워하는 것이고, 곡소리가 나는데 슬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이 여인의 모습 속에 저는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38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무엇을 한다고요?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저는 이게 묘하게 두 개의 모습이 다 합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이 왜 울며 눈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 자기의 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해서 모두 집중하는 것은 '아, 그래, 향유를 담은 옥합. 나에게는 도대체 어떤 향유 담은 옥합이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까?'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것이 우선순위이고 그것이 다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내가 예수 앞에 울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왜 울 수밖에 없는가?' 예수님 앞에 애통해 할 수 있는 것, 복 있는 자는 어떤 자라고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잖아요.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세상은 웃는 것이 우리 인생 속에서 행복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왜 울어야 할까요?
세상은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인정받는 것이 복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가난하고 배고프고 울고 버림받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여인을 통해서 도대체 무엇이 복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질질 짜고 우는 것이 복이 아니라, '왜 우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 거죠?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거죠. 자기의 어떤 모습이요? 죄 많은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죄 많은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저 여인, 저 여인이 했던 것들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이 한낮에 우물가에 갔었던 이유처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수치스러움 때문에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여기에 갔을까요, 여러분? 저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은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내 내면, 내 마음속의 울림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그 여인은 그 가르침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성령이 나의 마음을 찌를 때 그 성령의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네 죄를 파헤쳤을 때,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인정하는가를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고,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예수 앞에 나아가 울며 눈물로 그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빚진 자입니다. 은혜로 빚진 자입니다. 그 빚을 탕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 내 빚이 얼마나 크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죄는 우리를 정말 끈질기게, 지독하게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하고, 공동체의 일원 관계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근본 뿌리는 어디에서 나오냐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과 멀리 떨어졌을 때 그것이 극대화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찌르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애통해 할 수밖에 없게 만드시는 거죠. 바로 이 여인은 그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나아가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더 이상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정죄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우리를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하고 우리에게 모욕을 주는 그런 관계이지만, 여러분, 정말 아쉬운 게 무엇인지 아세요?
어떤 일들이 일어나면 요즘은 부부가 정말 1초도 생각 안 하고 그냥 헤어진대요. 정말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부부의 관계라는 것이 이제는 어떤 문제가 일어나면 1초도 생각 안 하고 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부부의 관계만 그런가요? 아니요, 요즘에는 자식과 부모의 관계도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일들이 자녀에게 크게 일어나서 내가 그 일을 수치스러워하고 감당하지 못하면, 자녀들과도 그냥 절연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일들이 너무나 쉽게 일어나고 보여지는 것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내 명예와 내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녀와 절연하고 부모와 절연하는 일들이 너무나 쉽게 일어나는 것들이 여러분,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 사랑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무엇을 한 거죠?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그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피리 소리가 들리니까 그녀는 지금 울고 있지만, 무엇을 경험하는 거죠?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 거죠?
오늘 본문 50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한번 상상해 보셨습니까? 이 여인의 인생이 얼마나 변했을지. 울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가져간 향유를 부었을 때, 여러분 그 여인은 어떠한 상황이었을까요? 분명히 몰입되어 있는 상황이었겠죠. 사랑의 표현이 정말 그랬죠. 그런데 가끔은 수군수군거렸던 소리가 들렸을 것 같아요. 저 같은 트리플 A형은 그런 소리 하나에 제 마음이 엄청 흔들렸을 것 같아요.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이거 내가 괜히 왔나?',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이 오히려 예수님께 해가 되지 않으려나?', '내가 이제 이거 나가서 어떻게 수습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내 마음을 다 했는데, 내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했을 때, 수군수군거렸을 때 '이거 그때 괜히 했나? 내가 괜히 이런 일들을 했나?' 라고 우리 걱정할 때가 참 많을 것 같아요. 그런데요, 여러분,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는 확신할 수 있는 게, 이 여인은 그 "평안히 가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했을 것 같아요. 빚을 탕감받았다는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경험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을 때 그 반응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아니, 이 사람이 누구인데 죄도 사하는가?"라고 하며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합니다. "당신이 무엇인데 이런 죄를 사하는가?" 특별히 여인을 향해서 더 그렇게 이야기했죠. "아니, 이 여인이 이런 큰 죄를 졌을 텐데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죄를 사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희도 그럴 때가 참 많아요. '내가 용서 못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라는 생각을 우리는 가집니다. 어떻게 보면 논리적으로, 어떻게 보면 감성적으로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세상이 기독교의 용서라는 것을 표현했을 때, 그러한 논리의 비약도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우리는 거기에 '아멘' 하는지 아십니까? 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비논리적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매하다고, 미련한 짓이라고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거기에 '아멘' 하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존재가 아니라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오천 데나리온을 탕감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말이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면 용서하셨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왜 그런지 아세요? 그 사람의 죄보다 내 죄가 더 많다는 것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도록 파송받은 사람들이라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으로서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여러분이 갖고 있는 대단한 것들을 헌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헌금을 많이 하거나, 여러분의 어떤 시간과 물질과 대단히 좋은 것들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피리를 불 때 즐거워하세요. 곡소리가 들릴 때 여러분, 우세요. 왜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까.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자와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슬퍼하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빚진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빚진 자요? 이럴 때 우리가 어색하고 뜬금없지만 연습을 해야 되겠죠. 옆에 있는 분들 한번 쳐다보십시오. 옆에 있는 분들보다 내가 더 큰 죄인입니다. 정말요. 내가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빚진 자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분들보다 더 빚진 자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더 많이 사랑하시면 돼요. 그렇죠? 원칙은 너무나 간단해요. 내가 더 많이 빚졌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이 사랑하시면 돼요. 그러면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증인 될 때 누가 드러나는 거죠? 사랑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설교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7장 24-35절 이 세대의 사람 (0) | 2025.09.22 |
---|---|
누가복음 7장 18-23절 오실 이 (0) | 2025.09.21 |
누가복음 7장 11-17절 일어나라 (0) | 2025.09.20 |
누가복음 7장 1-10절 백부장의 비밀 (0) | 2025.09.19 |
누가복음 6장 46-49절 내말을 듣고 전하는 자 (0) | 2025.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