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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묵상/요한복음

요한복음 8장 52-59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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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52-59절

52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한복음 7장과 8장은 초막절 때에 일어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논쟁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참 생수요, 참 빛임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을 집어 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스로 있는 자로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유대인들이 존경했던 아브라함도 죽고, 선지자들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청년 하나가 출현해서 자기의 말을 지키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웃긴 일입니까? 무리 중에는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요, 요셉의 아들임을 알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인간인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문제로 여호와의 증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선지자 중에 하나요,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인간인 예수는 절대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을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56절에서 유대인들이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부활의 첫 열매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항상 소원했던 부활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적하듯이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의 족보를 보면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21-24절에 죽음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했기에 죽음에 속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를 에녹과 같이 죽음을 이기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배고픔을 느끼시고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고 기적을 베푸신 것은 자기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이 첫 열매가 되어 아브라함이 소원했던 것을 이루시어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십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이 진리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돌을 들었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너는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간접적으로 말씀하시다가 58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고 답하십니다. 이 말은 출애굽기 3장 14절을 인용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심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몇천 년 후의 사람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 전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본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탄식합니다. 아~ 이 정도면 유대인들이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경고가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누구입니까? 열심히 있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쫓았다고 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나의 구원을 내 열심과 행동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진정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돌의 집어 들고 있는 유대인과 같은 자입니다.

 

참 생수시며,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창세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을 이끌어 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과 똑같이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놓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창세기 22장으로 끌고 가십니다. 우리가 결코 놓고 싶지 않은 것을 내려놓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대와 감사가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기필코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인해 감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 기대와 감사가 오늘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길 소원합니다.

redlong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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