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10-17절
10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뱃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안히라 하시니 15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은 후 16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서 전체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6:33에는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울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라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같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기 전에 제자들의 전도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의 전도 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을 보고 좇아 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좇아 온 무리들을 보시고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4:5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질승의 밥이 되었도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들짐승의 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제자장, 선지자, 그리고 왕이 있었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배를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의 양은 들집승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배를 채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먼저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십니다. 육체의 배고픔을 먼저 해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배고픔, 즉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좇아 온 무리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그들을 마을과 촌으로 보내어 양식을 구하도록 제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요한복음음에서는 빌립)의 해결 방법은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빌립의 해결 방법이 맞습니다. 무리들이 빵을 조금이라도 먹기 위해선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도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돈과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고백을 받기 위함이십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들을 찾아 온 무리들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으로 그들을 찾아온 자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목자가 아니기때문에 그 무리들의 진정한 문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무리들의 문제는 떡으로 배고픔을 해결하는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게서 그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온전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표현과 아주 유사합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후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마가복음 6:41) 마가는 본문에서 4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리고 “주어”이 4개의 동사를 마가는 마지막 만찬을 묘사하고 있는 14장 22절에 다시 한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왜 마가는 4개의 동사를 오병이어의 기적과 마지막 만찬에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마가복음 14장 22절 후반부에 보면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자기의 몸과 피라고 하시며 먹고 마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음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인 우리의 목자가 되시기 위해서,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 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치시겠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바침으로 우리를 새로운 관계 속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에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처음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에 축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물고기에 축사하셨기 때문에 떡과 물고기가 오천명이나 먹일 수 있는 많은 양으로 변화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을 축복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의 표현대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린 양으로서 살아가시며 십자가의 사건을 감당하시지만 이 일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목자 없는 양과 같았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 거했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늘 능력의 내려 놓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는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의 몸을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잔치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 나갈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 천국 잔치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우리의 유익에 목매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redlong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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