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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묵상/누가복음

누가복음 22장 47-53절 (가롯 유다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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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장 47-53절

47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뭉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잠들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죽음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를 하셨지만, 제자들은 슬픔에 잠겨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기록하지 않고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후에 기도론 시내 건너편 동산에서 잡히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셨다고 표현을 할까요? 구약에서 기드론 시내가 나오는 곳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예루살렘을 차지하자 다윗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도망을 합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인 압살롬으로부터 배신당한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다윗에게 기드론 시내는 배반의 강이며 슬픔의 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기 위해서 바로 이 배반의 강이며 슬픔의 강인 기드론 시내를 지나가셔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배반,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는 사실을…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겟세마네를 동산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동산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우리에게 또 다른 동산을 연상하게 합니다.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유명한 설교자인 아더 핑크는 이렇게 두 동산의 관계를 묘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동산에 들어 가신 것은 대번에 우리로 하여금 에덴을 생각나게 한다. 그 둘 사이의 대조가 정말 두드러져 보인다. 에덴에서는 모든 것이 밝았다. 겟세마네에서는 모든 것이 무시 무시 했다. 에덴에서는 아담과 하와는 사단과 쓸데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겟세마네에서는 마지막 아담이 아버지의 얼굴을 구했다. 에덴에서는 아담이 범죄를 했는데, 겟세마네에서는 구주께서 고난을 받으셨다. 에덴에서는 아담이 넘어졌는데, 겟세마네에서는 구속주께서 이기셨다. 에덴에서의 투쟁은 낮에 일어났는데, 겟세마네에서의 투쟁은 밤에 치루어졌다. 에덴에서는 사단 앞에 아담이 쓰러졌고 겟세마네에서는 그리스도 앞에 병사들이 쓰러졌다. 에덴에서는 인류가 망했고 겟세마네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공언하셨다” 배반의 강을 건너시는 예수님께서 감당하셔야 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이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몸을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1-6절에서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였다고 기록된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의 마음과 계획이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은 힘이 없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들이 내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무리에게 내어 주십니다. 이것이 십자가 희생의 참 의미입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어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는 한 사람(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인간의 잣대로 보면 이 얼마나 의리 있고 충성된 모습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다릅니다. “칼을 칼집에 꽃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자기 죽음을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던 장면과 유사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네 뒤로 물러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열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 열심히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때가 종종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계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서 있습니다. 나의 열심히 하나님의 뜻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 앞에 우리의 열심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지키는 것은 자기를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배반의 강을 건너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위하여 그의 권능을 내려놓으시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 또한 배반의 강을 건너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 안에서 다른 이를 섬김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드러나길 소원합니다.

redlong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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