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장 16-21절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를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세상’이란 말은 각 개개인이란 말이 아닙니다. 요한은 세상이라는 말을 통계학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유명한 설교자인 George Whitefield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설교하면서 “세상은 악하고 진절머리 나고 구역질 나는 곳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사랑을 끌 만한 요소가 없다….”라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부터 지속해서 세상을 어둠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어둠을 비취었는데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배만 채웁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그들의 인생을 주관합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시작하신,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표현으로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중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놋뱀에 들렸던 것처럼 인자도 들릴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입니다. 저주와 심판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놋뱀을 들었던 것처럼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신 예수를 저주의 나무에 달아매는 대가를 치르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괜찮아서, 가능성이 있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압니다. 얼마나 부패했는지, 죄인인지를…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은혜요, 선물입니다. 은혜를 갚으면 더는 은혜가 아닙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신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신뢰와 순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가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 우리 스스로가 고백하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행동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하나님을 믿었다면 아마도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을 12, 15, 17장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 의심과 불순종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만남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 반응의 표현으로 우리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성령의 역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사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옥도 영생입니다. 문제는 영원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영원히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영생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주라 고백한 자로서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하늘의 기쁨과 능력을 갖추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담대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로마서 8:38-39)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붙잡았던 손을 놓은 것처럼 느낄 때도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백성들을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선하게 살아 온 사람, 불쌍한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지 않으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돌아가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죽음으로 영생이 보장되었는데 영생을 소유한 자들은 ‘그를 믿는 자’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 철학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천국에 못 간다면 인간의 생각으로는 참 불공평합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같은 사람은 꼭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답답하십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답답함으로 하나님의 불공평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먼저 찬양해야 합니다. 만약에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 뜻과 계획을 안다면 질적으로 다른 답답함이 몰려와야 합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교회는 다니지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영생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살길은 열심히 자기 방식대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로 제시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입술의 통해서, 삶의 행동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전해지길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자로서 이 땅에서 하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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