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6-11절
6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그들이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여러분, '주인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이 주인이 되면 어떤 행동을 하십니까? 오늘 본문 맨 마지막 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노기가 가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바리새인들은 주인의식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왜 화가 날까요? 어떤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일이 중요하지 않고 나와 상관없으면 화가 나지 않죠.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면,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이고 다른 반응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화가 납니다.
옛날 한국 가정은 가부장 제도였잖아요. 지금은 아니겠지만, 예전에는 남자들이, 아버지들이 화가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부드러운 인상보다는 화가 많은 사람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를 봐도, 저희 아들에게 물어보면 아빠는 '욱하는 아빠'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한국의 남자들은 주인의식이 상당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남자로서의 권위가 가정에 드러나기를 원하고, 아버지의 틀대로 되기를 원하며, 아버지로서의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권위에 도전이 되거나 그 권위가 무너지면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실 많은 남자가 자기를 변호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들은 화가 나 있고 분노에 차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성전, 그리고 율법에 대한 주인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라오면서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요구를 받아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사에서는 사장처럼 일하라고 요구받았고, 교회에서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의 주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내가 주인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저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엉뚱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당시에 자신들이 선민이고 종교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저희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화두를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은 교회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있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계십니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가정의 주인은 누구시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라고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안식일 논쟁이 결국 "누가 주인인가? 누가 우리 인생의 주인인가? 누가 이 교회의 주인인가? 누가 이 가정의 주인인가?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를 질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내가 내 삶의 주인, 내 가정의 주인, 내 공동체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많았다면 회개하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내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순종하기를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은 "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지난주 안식일 논쟁과 연결시키고 싶은 겁니다. 지난 사건의 결론은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과 이스라엘의 전통 규례로 지켜지던 그 옛 원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서 안식일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그 의미대로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성도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의 예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반대편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 손 마른 사람을 두시는 겁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회복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규례상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데에는 예외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생명에 지장이 되는 병은 고치도록 노력하지만, 생명에 지장이 되지 않는 병은 안식일에는 그냥 두어야 했습니다. 만약 고치려고 하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안식일에, 고쳐서는 안 되는 병을 고침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빌미를 제공하셨을까요?
이는 안식일에 새로운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일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안식일이 이 사람을 통해 충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 이제는 안식일날 생명에 지장 없는 병도 고쳐도 되는구나"라고 결론 내린다면,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행위에 대한 차이점만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자꾸 율법 조항을 더하고 빼는 논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9절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일의 원리 원칙에서 무엇이 더 나으냐는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당연히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이것이 충돌이 됩니다. 손 마른 자의 손을 고치는 것이 생명을 구하는 일일까요? 그들의 기준에서는 생명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선한 일일까요, 악한 일일까요? 우리에게는 선한 일이지만, 바리새인들의 잣대로는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악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선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시자 그의 손이 회복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원리를 정하셨습니다. 지금 이 손 마른 자를 회복시키는 기적은 '선한 것'이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것을 선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데 있습니다. 성경에서 '선하다'와 '악하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개념을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근거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진정한 선이 가능합니다.
또한 '선하다'는 개념은 창조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날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이 창조의 '완성'을 의미한다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것은 곧 창조의 계획을 완성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자를 고치신 것은, 그 사람이 이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존재가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불러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선한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면, 손 마른 자에게 기적을 베푸신 사건은 결국 '생명'과 관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은 적이 없지만,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의 좋으심과 선하심이 나타나고, 생명이 회복되는 일이 일어나는 날이라는 새로운 원리가 선포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원리는 교회가 시작되면서 '주일'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주일은 성도들이 모여 단순히 종교 예식을 행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좋으심을 확인받고,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확인받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주일을, 그리고 우리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으로 주일을 지키고 가정을 세워왔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권위가 무너지면 화를 낸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왜 일하실까요? 바로 하나님의 계획, 즉 창조와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가정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일어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스림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분을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내 모든 것을 주인 되신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일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렸듯이, 제 능력 이상으로 욕심을 내어 짐을 짊어졌을 때, 걷는 기쁨보다는 짐에 짓눌리는 불평과 불만이 점점 커졌습니다. 우리가 주인 되어 내 뜻대로 살아가다 보면, 그 삶의 짐이 우리 인생을 짓누르고, 심지어는 그 짐이 이끄는 방향으로 의미 없이 질질 끌려가는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복은 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고, 하늘이 주시는 기쁨으로 내 삶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제 안식일의 새로운 질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전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규례에 얽매여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김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생명을 주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하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선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생명을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선한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시는 여러분 삶의 영역들을 찾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단점, 문제점, 지금 가장 힘들어하는 그 문제점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 여러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부족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좋다"고 표현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봐야 합니다. 내 자녀를, 내 아내를, 내 부모를 볼 때 그 사람만 보면 불평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우리는 그를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선한 것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품을 때, 우리의 가정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이 회복되려면, 먼저 내가 그 관계 속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내가 회복을 경험해야 내 가족에게,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 선하심을 경험할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못났다고 하는 내 자식이 예뻐 보이는 이유는 내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생명의 태어남을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하사나교회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기적은 생명과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보잘것없는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이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너무 큰 기적만을 바라지만, 오늘 아침을 먹은 것도, 내 자식과 대화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기적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안식일의 개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매일을 그냥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그 놀라운 기적이 나의 가정과 공동체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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