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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6장 1-5절 안식일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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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 1-5절
6:1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다시 표현한다면, 여러분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이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계십니까? 사실 율법을 보면, 특별히 십계명의 사계명에 너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잖아요. 저희는 주일을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키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 율법, 그 계명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신앙생활을 한 70년대, 80년대로 돌아가 보시면, 그때 교회 생활 하셨던 분들은 기억나실 겁니다. 금요일, 토요일 저녁에 무엇을 했죠? 주일날 먹을 밥을 미리 짓거나 음식은 미리 만들어 놓았습니다. 헌금도 미리 준비했고요.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어떤 의식, 혹은 부담감이 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이 명령이 현재 얼마나 우리에게 무게감을 주고 있을까요?

저를 포함해서, 우리가 주일날 하는 행동들을 한번 잘 살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주일날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십니까? 예배드리는 시간, 교회에 있었던 그 시간들을 제외하고 그 외의 시간들을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상시와 다를까요, 아니면 같을까요? '거룩하게 지키라'는 의미는 '구별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날과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는 의미가 있거든요. 여러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평일과 주일에 구별된 패턴이 있으십니까? 구별된 모습들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왠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드실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구별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거룩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저와 여러분이 좀 발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구별'과 '거룩'이라는 개념을 잠시 옆에 두고, 저와 여러분이 먼저 들어야 할 전제 조건은 바로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봤던 본문에서 "새 포도주는 어디에 담으라"고요? "새 부대에 담는다"고 했잖아요. 지금 이 '새 부대에 담는다'는 의미를 저희가 온전히 깨달아야, 지금 이 논쟁이 어떤 논쟁인지 이해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어떻게 주일에, 안식일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6장 1절은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배경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인가요?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죠?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으니." 아마도 굉장히 배고팠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다가 이삭을 비벼 먹었다는 것은 많은 양을 타작하거나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행위라고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2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딴지를 걸고 있는 거죠. 저희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마다 항상 딴지를 걸었던 그룹들이 있습니다. 누구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학자들. 한 무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얘기하죠?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왜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 지적이 적어도 이 시대적인 상황에서는 맞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율법, 특히 사계명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열심히 노력했고, 그 열심의 표현으로 여러 가지 부수적인 규례와 계명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일정 거리를 걷지 못하거나 어떤 일들을 하지 못하는 여러 부칙들이 만들어졌던 것을 저희가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타작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 타작하는 것을 금하는 것을 유대인 규례 속에서 찾아볼 수 있거든요. 2000년 전에는 이런 일들을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단 말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항상 오해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은 나쁜 사람, 서기관들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 당시로 돌아가면 그들이 지적하고 주장하는 것들이 맞다는 거죠.

문제는, 지금 누가가 우리에게 지난주부터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뭐냐면, '옛 시대는 지나갔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 시대의 논리에서는 지금 바리새인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들이 맞다는 겁니다. 그렇죠? 그러면 지금 오늘 본문의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이 뭐냐면, 이 바리새인들의 논쟁 안으로 들어가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바리새인들의 논쟁 안으로 들어가서 그 논쟁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질 때가 참 많습니다. 결국 결론적으로 "무슨 행동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무슨 행동을 하는 데 우리에게 자유가 있고 없음으로" 결론을 맺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지금 새로운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데, 새로운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터져버려서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점이 뭘까요? 바로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을 자꾸 옛 율법의 상황으로 담아두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터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왜 어려움이 있느냐?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열심, 우리가 갖고 있는 전통, 우리가 갖고 있는 규례와 법칙에 담으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터지면 우리는 어떻게 하냐면, 항상 임시방편으로 때웁니다(patch). 완전히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해결하고 모면하기 위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로 자꾸 때우다 보니까 결국은 누더기가 되고 계속 터지는 사건들을 저희는 경험하게 되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부대 안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너희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만약 옛 부대, 옛 율법 안에서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을 꾸짖으셔야 합니다. 그렇죠? 안식일을 범한 것이거든요. 중요한 것은 '손으로 비벼 먹은 아주 작은 행동이어서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라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되었든 옛 율법의, 옛 부대 안에서는 잘못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부대 안의 논리로는 예수님도 그들을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3절에 보면 이상한 얘기를 하십니다. 한번 볼까요? 3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부대에 담겼다면 미래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논리적으로 얘기하면 예수님이 갖고 계신, 소위 말해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던 새로운 원리 원칙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맞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현재의 율법이 아니라, 그것보다 한참 전에 있었던 다윗의 사건 하나를 끌고 와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다윗의 사건이 미래의 사건과 연관이 될까요, 안 될까요? 연관이 되겠죠.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다윗의 사건 하나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윗의 사건이 의미하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그것이 미래에 예수님으로부터 완성될 사건과 연관된다는 것을 우리가 연결하지 않으면, 이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내용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가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 도망가는 길에 음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놉이라는 지역에 성막이 있어서 그곳에 찾아가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하죠. 아히멜렉 제사장은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먹을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막에 드렸던 진설병이었습니다. 새롭게 진설병을 드리면 이전에 드렸던 것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먹게 되는 것입니까? 다윗이 먹게 되는 겁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너희가 거룩하게 지냈느냐"라는 질문을 할 때 다윗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고백한 다음에, 아히멜렉이 진설병을 나누어 주는 것이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레위 지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것을 다윗이 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진설병을 먹었다, 안 먹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사무엘상 21장의 기록은 그 당시 왕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 당시 왕은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누가 세운 것이죠? 사람들이 세웠습니다. 사무엘상에는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왕권이 옮겨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의 배경에는 '왕은 누가 세우시는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지금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실 권한과 능력이 있다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거죠. 그런데 단순히 하나님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 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쓰였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설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 뭘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요? 어떻게 부자가 되는가?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가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을까요? 어떻게 건강해지는가? 어떻게 인간관계를 잘할 수 있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 싶을까요? 그런 내용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임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죠. 그렇다면 지금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전에 있었던 것을 먹을 수 없는 존재가 먹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것들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싶은 거거든요.

그런데 왜 뜬금없이 사계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다윗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사계명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사계명으로 답하지 않고 차원을 올려버리셨습니다. 무슨 이슈로요? 지금 계속해서 누가복음도 그렇고 복음서에서 끊임없이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딴지를 거는 이유가 뭐였죠? "예수,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느냐? 무슨 권위로 귀신을 쫓아내느냐? 무슨 권위로 병을 고치느냐? 무슨 권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느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의 답은 뭐였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계명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서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돌려버리시는 겁니다.

"나에게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권위가 있다." 그 말을 오늘 본문에서 무엇으로 설명하죠? 5절에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느냐, 무슨 행동을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그쪽으로 갑니다. "무슨 행동을 할까, 말까?" 우리는 끊임없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라'는 것보다는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지 말라. 쇼핑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 뭐 하지 말라.' '하지 말라'는 것을 들으면 우리는 항상 죄책감(guilty feeling)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논쟁을 하면, 그런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으니까 "아, 이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니 그런 것 안 해도 되겠지"라고 또 결론을 내버립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이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

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얘기를 하실까요? 그러면 안식일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단순하게 '쉬는 날'이라고 이해하지만, 성경에서 안식일은 '완성'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인간, 즉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개념 안에서 완성이 무너져 버립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완성이 지연되어 버린 겁니다. 연기되어 버린 겁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그 연기되었던 것들이 완성되는 것을 우리는 '구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창세기 1장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는 이야기가 일곱째 날에는 없습니다. 그 완성의 역사 속에 다윗이 있었던 것이고,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야기할 때 다윗으로부터 시작해서 메시아, 곧 인자가 오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곧 '창조주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그 완성을 이루실 분'이라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본인을 창조주이신 하나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표현하고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고 계십니까? 어떻게 안식일을 저희가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아, 뭘 하지 말아야 하나? 아니면 뭘 해야 하나? 주일날 교회에 나가야 하나?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라고 행동적인 생각으로만 접근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가, 인정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 속에서 구원자로 고백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예배 부름을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심은 구원의 완성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의 완성입니다. 성도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온전하심과 완전하심이 이 땅에서 한번 우리에게 구원사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왜 완전하심이냐면,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완성되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다윗의 구원 사건이 나로 말미암아 미래에 일어날 것이며, 새로운 나라가 이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 사건이 완성된 다음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누가와 제자들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갈등이 있었고, 이삭을 비벼 먹는 일들처럼 그 불완전함 속에서 계속해서 여러 일을 경험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라보고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제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것, 창조의 계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입니다.

또 여기서 우리는 행동적인 반응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뭐 해야지, 뭐 해야지."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행동적인 부분들을 요구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결과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기까지 가기 전에 우리가 하나를 확인하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바로 '관계성'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식일의 주인'으로 관계를 맺고 있느냐로부터 시작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인정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받아들이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관계를 맺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살고 있던 나를 구원해주신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아직도 세상 속에서 살고 계십니까? 결국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백되어지는 하나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단순히 주일에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를 구원하시고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거죠.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자, 그러면 그 관계성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뭘까요? 요즘 유튜브를 보면 이런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친구, 많이 필요 없다" 이런 얘기도 여러분 많이 듣게 되잖아요. 그리고 "인간의 관계는 깊을 필요 없다. 왜? 깊으면 상처받고 어려우니까 그냥 얕은 친구를 여럿 만드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관계성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으로, 주인과 종으로서의 관계성으로, 그리고 친구로서의 관계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관계성이 어떻게 되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여러분과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을 불러 내 자녀 삼고 싶고, 여러분을 불러 나의 종으로 삼고 싶고, 여러분을 불러 나의 친구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반응하고 계십니까?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이 행동입니다.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들입니다.

행동이 먼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그 율법의 계명들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던 관계성이 먼저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교회 다니시는 분들이 그 관계성을 잊어버린 채, 그냥 단순히 행동만 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 행동은 우리를 얽매는 법이 되어버리고 족쇄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것은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너와 관계를 맺게 되면 너의 멍에는 가벼워진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이제 더 이상 내 근심과 걱정이 주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경험하면 복이죠. 저는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그리고 하사나교회의 공동체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는 축복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맛을 조금이라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왜 열망이 없을까? 갈망함이 없을까? 여러분,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것 중 하나가, 여러분이 갈망하고 열망하는 것,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 될까요? 여러분이 경험하지 않는 것들을 갈망하게 되나요? 제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경험하지 않은 것은 갈망할 수 없습니다. 열망할 수 없고, 바랄 수 없습니다. 안 그러신 척하시는데, 간접적인 경험은 '동경'하게 되는 거죠. 그 간접적인 것을 동경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죠? 제삼자가 그것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반응 때문에 동경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좋은 전도법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기쁨과 변화를 다른 사람이 보고 동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결국 우리가 동경하고 갈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제삼자가 그것을 누리는 것을 볼 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 단계일 뿐입니다. 나로 하여금 정말 그것만 바라보고 그것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일단 한 번 뭐라도 찍어서 먹어보는 겁니다. 제삼자적인 경험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했을 때, 그것은 제삼자적인 경험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제삼자의 경험에 내가 몰입해도,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삼자적인 경험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를 맺자고 하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다른 사람이 만났던 하나님', '다른 사람이 보았던 천국', '다른 사람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들을 여러분이 맛보기를 원하시는 거죠. 그것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계속 헌 부대에 담습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냈던 율법과 규례, 자신들의 사고와 능력에 근거하여 헌 부대에 담습니다. 터지면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때우고(patch) 꿰매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헌 부대를 벗어버리고 이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그라." 다른 말로 얘기하면, 더 이상 안식일의 주인을 만날 때 너희가 세운 율법과 규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 만나라는 겁니다.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창조를 완성하셨던 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뒤틀려지고 연기되었던 창조의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이루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뒤틀렸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별 의미 없이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가치(value)를 두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에 더 가치를 두고 계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능력과 세상의 힘(power)에 여러분의 가치를 두고 계십니까?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새로운 원리이고, 새로운 다스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권 안에, 다스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눈과 새로운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에 합당한 행동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가 변하겠죠. 우리의 주일의 삶이 달라지겠죠. 오해 말고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일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 쇼핑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거죠. 만약 내가 주일을 구별된 삶으로 살아간다면, 이제 매일매일의 삶을 구별된 삶으로 확장하는 일에 우리는 순종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그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좀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함께 그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 영역 안에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남은 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남은 자'라는 것은 우리가 다수(majority)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다수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세상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 휩쓸려 가기 쉽다는 것이고요. 헌 부대에 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고, 세상은 그것을 당연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일들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공동체들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가장 기본 단위가 어딜까요? 가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을 지키셔야 합니다. 가정을 '새 부대'로 바꾸셔야 합니다. 우리가 목숨 걸어야 할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최소 단위인 이 가정을 지켜야 내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온전히 해야 가정을 지킬 수 있고, 가정이 온전히 지켜져야 내가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겁니다.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심을, 새로운 나라와 새 하늘이 이 가정에서 드러남을,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드러남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우리 신앙의 가장 첫 번째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하사나교회 공동체의 가정 안에 그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회복'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실 우리가 하나 놓치고 있는 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잖아요. 그 새로운 피조물들이 이룬 공동체인 가정은 새로운 피조물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너져 있고 황폐해진 우리 가정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이 땅에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지상 명령입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우리의 지상 명령은 이 땅에서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회복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전쟁터고, 우리의 목적이고, 삶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는 가정이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의 목회의 가장 정점은 '가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사나 공동체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보고 힘써야 하는 것은 '우리의 가정,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을 회복할 것인가'입니다. 이것이 제가 온전히 그 일들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거룩한 부담으로 와닿아야 하는 것,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우리가 싸워야 할 전쟁터는 바로 우리의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 내 부모들. 그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확신하는데, 우리의 가정들이 올바르게 세워질 때 교회는 자동적으로 올바로 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과거에 다르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가 올바로 세워지고, 그것을 통해서 가정들이 세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정이 올바로 세워져야, 가정 속에서 가정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마음들이 있어야 공동체도 그런 마음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그 일들을 누가 하신다고요? 우리가 어떤 행동 지침을 만들어서, "아, 오늘부터 우리 가정의 십계명. 제1계명: 아버지에게 복종하라"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딱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가정의 주인은 누구심을 고백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앞에 먼저 남편이 순종할 때, 가정은 변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의 주인이심을 아내가 먼저 순종할 때, 가정은 변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가정의 주인이심을 자녀들이 먼저 순종할 때, 가정은 변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가정의 주인이심을 부모들이 먼저 순종할 때, 가정은 변할 겁니다. 여러분, 제 의도를 아십니까? 누가 먼저가 아니라, 각자가 먼저 변하면 가정은 변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할 수 있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다스림 안에 들어가기 위한 관계 설정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 하나님으로 인정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할 때, 그 놀라운 기적은 시작됩니다. 그 일들을 목격하고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맛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갈망하고 끊임없이 바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럴 때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고요. 우리의 가정을 통해서, 우리의 공동체를 통해서 그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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