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장 27-39절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찬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을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팀을 나누어 게임을 할 때 어떻게 팀을 나누나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대표자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팀원을 뽑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누구를 먼저 뽑죠? 잘하는 사람, 실력 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이게 처음에는 괜찮은데, 남은 사람들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아직 뽑히지 않은 사람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언제 뽑히나' 하고 말이죠. 스스로 잘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뽑히지 않으면 황당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화가 날 때가 있는 것을 어떤 분들은 경험하셨을 겁니다. 물론 경험하지 않으신 분들도 있겠지요.
왜 그럴까요? 그 게임에서 이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기려면 실력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우리는 사실 경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내신 분들은 경쟁 사회에 내몰렸던 것 같습니다. 뭐든지 이겨야 하고 강자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들. 그래서 친구들끼리 팀을 나누어 게임을 할 때조차 무조건 조금이라도 뛰어난 사람을 내가 먼저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문화와 습관에 젖어들 때가 참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세상이 원하는 경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 안에서도 경쟁이 됩니다.
'신앙의 경쟁', 좋게 포장하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구역이 최고야", "우리 교회가 최고야" 하면서 우리는 늘 경쟁하듯 신앙생활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을 때,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을까요? 능력 있는 사람, 뛰어난 사람들을 선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라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레위라는 사람은 마태복음의 저자인 바로 그 마태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 역사상 굉장히 중요한 사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태복음을 쓴 저자'라고 하면 굉장히 뛰어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의도적으로 이 레위라는 사람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불렀을 때, 이 사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누구죠?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우리가 4장부터 살펴볼 때,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의 반대 지점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서기관들이죠.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봤던 중풍병자를 고치는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네 죄가 사해졌다"라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죄 사함은 누구만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네가 그 일을 하느냐"고 지적했던 것을 저희가 발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돌려서 얘기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이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를 수 있습니까?"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제자,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뛰어나서요? 여러분이 좀 괜찮은 사람이어서요? 사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생각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괜찮은 사람이지" 하고 말입니다.
아닌 표정을 짓고 계시면 정답인데, 사실 그렇게 예의 바르게 표정을 짓더라도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나는 여기에 앉아서 하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레위, 바로 이 세리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는 의미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굉장히 유명한 성경 구절이잖아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여러분은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맨 마지막 절인 39절을 보면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와인을 아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새로 만든 와인과 오래된 와인 중에서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하죠? 오래된 와인을 선택합니다. 왜요? 오래된 와인이 와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묵은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묵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묵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좋다는 것을 선포하고 계심을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자도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포도주가 되었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부대에 담겨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7절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다고 말입니다. 지난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명령에 중풍병자가 그대로 행했던 것을 저희가 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면, 제자가 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반응하는 자입니다.
믿음이란 결국 반응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자꾸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믿음이 반응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반응의 결과물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반응의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반응하게 되었는가'입니다. 바로 우리 존재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쓰였던 표현이 "너희가 귀가 있는데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응하는 자는 들을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한 것이죠.
자, 어떻게 반응합니까? 2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까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를 수 있는가?' 그런데 성경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이 그물과 모든 것을 버렸던 것처럼 지금 세리 레위도 모든 것을 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렸는가, 그리고 완전히 예수님을 온전하게 따랐는가? 그것은 성경의 뒷부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 잡는 일도 있었고,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결과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먼저 말씀하시며 의도적으로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보기에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성경은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라고 성경이 표현하듯, 우리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보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풍병자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세요?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에 갔는데,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레위가 했던 일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29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중풍병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 레위에게는 큰 잔치를 벌인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레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아주 잘 묘사하고 실행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잔치 벌이는 것을 꾸준히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도 잔치이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임에도 잔치의 개념이 있으며, 예수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그것을 잔치의 개념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많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 레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잔치'로 표현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성도에게는 잔치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잔치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저는 예배가 잔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 후에 나누는 교제도 잔치가 되어야 하지만, 그 친교가 진정한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 자체가 잔치의 핵심(main course)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축하(celebration)가 되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냥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 속에 기쁨이 있어야 하고, 풍성함이 있어야 하며,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function)이 된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특히 이민교회 목회를 하면 할수록 이것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구조적으로 이민교회는 교제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이 예배에 잔치의 개념이 들어가고, 그 잔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서 회복되어야 우리가 평일에 드리는 삶의 예배에 힘이 생기고, 삶의 질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개념을 우리가 다시 찾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잔치는 어떻습니까?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잔치는 좋은 음식과 풍성함, 그리고 손님들도 좀 괜찮은 손님들이 와야 그 잔치가 풍성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괜찮은 사람 딱 한 분만 계시면 됩니다.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계시면 됩니다. 하나님 한 분만 계시면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음식이 있느냐 없느냐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레위가 베푼 잔치의 모습을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29절에 보면, 그가 큰 잔치를 여는데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고 합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앉아 있다고요?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앉아 있더라." 그런데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하나같이 자격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 한 분만 제외하고는 모두 자격 미달인 사람들이라고 보여줍니다. 우리가 게임을 할 때 대표자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늘 이기시는데, 그분이 선택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볼 때 힘없고, 저 사람을 뽑으면 계속 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 예수님은 참 대단하시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지만, "나도 그중의 한 명이다"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뽑으셨다면, 나 역시 결국은 죄인이고, 볼품없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이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하실 수 있으십니까?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할 싸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승리를 원하며,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가 다음번에 읽을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쟁 사회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신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 즉 '나를 소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책입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어떻게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여러분이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뛰어나서 예수님께서 나를 제자로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라는 것, 나 혼자 싸워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고 고백할 때, 그때부터 여러분은 그 큰 잔치의 기쁨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많이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그 기쁨은 깊어집니다. 내가 무능력자라는 것을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그 기쁨은 놀라워집니다. 그런데 만약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잠식하고 빼앗아 버리는 것이 됩니다.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일했다고 하는데, 결국 그 열심이 하나님의 열심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동이었습니다.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말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 질문에 답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이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마음을 품었던 사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리는 단순히 세금을 걷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세리는 배신자였고,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들, 핍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왜요? 자기들의 재산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리 때문에 노예가 되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세리를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래, 저 세리는 좀 다르겠지' 하고 잔칫집에 갔는데, 누가 있는 겁니까? 또 다른 세리들이 있는 겁니다. 내 것을 빼앗고 나를 핍박했던 바로 그 세리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말도 섞기 싫은 불량한 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 잔치에 참여하고 싶으십니까? 이게 쉬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모습을 그릴 때, 어떤 모습을 그리시나요? 교양 있고 괜찮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연상합니다. 우리가 항상 "좋은 교회가 되자"고 이야기할 때, 최근에 많이 하는 이야기가 "상식에 맞는 교회를 만듭시다"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독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식에 맞는 교회, 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교회를 만듭시다"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일정 부분 맞는 말입니다. 현시대를 살아갈 때 분명히 그런 부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누가복음이 쓰여졌던 그 당시 누가의 눈으로 봤을 때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용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쩌면 용납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여기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가 교회에 온다면 "저 사람은 왜 왔지?", "안 왔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다가, 그 다음에는 "아, 나 교회를 떠나야겠다"라는 생각까지 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좋은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일들이 일어나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질문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하셨을까? 그리고 누가는 왜 그것을 '잔치'라고 이야기했을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죄인을 위해서,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왔다."
죄인들을 불러 그들을 회개시켜야 한다는 목적. 우리도 모두 거기에 동의합니다. 교회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합니다. 여기까지는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 다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3절을 보면 비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즉,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대로 죄인을 회개시키는 것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러면 죄인이 회개해서 들어왔다면 회개의 증거를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회개의 증거는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교회 공동체에 들어왔으면, 우리 식으로 말하면 회개하고 전도받아 왔으면 사람이 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교회로 모였으면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는 것 같지만, 여러분, 이것은 틀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죠?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이기 때문에 잔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다음에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까? 왜 기도하고 금식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드신 비유가 바로 "새 옷을 찢어 헌 옷에 붙이지 않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묵은 것'과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이야기하는 것,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낡은 것', '옛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8장 13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새 것'과 '낡은 것'을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새 언약'이며 옛 언약은 결국 없어져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공생애 사역의 첫 시작으로 산에 올라가셔서 산상수훈을 하십니다. 5장부터 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은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실 때 새로운 법과 원칙을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새로운 법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원칙으로 가는 것인데, 그 새로운 원칙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 그래서 그것이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모로 판단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외모적인 부분으로만 생각합니다. 좋은 사람이 모여서 뛰어난 일들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16장 7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해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윗은 뛰어난 사람이지만, 사무엘이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확인하는 그 과정 속에서 그는 연약하고 아무 힘없는 소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결국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기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묵은 것이 좋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에요. 그렇죠, 묵은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묵은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묵은 것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상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죠? 버려야 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 그들의 사상은 썩고 상해서 버려야 할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새로운 시대에 '새 술'을 만드셨습니다. 바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에 담는 것입니까? '새 부대', '새 언약', '새 율법'에 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새 술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언약 안에 담는다는 것이 끝일까요, 아니면 시작일까요? 시작입니다. 새로운 술이 처음부터 좋은 것은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서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익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새 술로서 새 부대에 담겨 잔치를 벌일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고, 그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드려질 때, 그것이 어떤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까? 바로 '좋은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좋은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있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을 좋은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 잔칫집에 좋은 포도주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아니,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왜 이제야 주십니까?"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의 가정 속에서,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마지막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익어져서 '좋은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목적이 되는 것이고, 우리 하사나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에 화답해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이미 들을 귀 있는 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르셔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여러분이 버리지 않으셔도 하나님께서 버리게 만드실 것입니다. 왜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 일들을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 부대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새 부대에 담긴 자로서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큰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어떻게 잔치를 베풀죠? 새 술이 익어감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과 함께함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렇게 원하시면 안 됩니다. "아, 정말 잘 익은 좋은 포도주 같은 사람이 우리와 함께해 주십시오." 라고 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우리는 항상 신앙의 연륜이 있는 뛰어난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새 부대'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새 부대'라는 말이 조금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요즘 와인을 어디에 담죠? 오크통에 담습니다. 위스키도 오크통에 담습니다. 그러면 좋은 위스키, 좋은 와인은 어떤 향이 배어 나와야 할까요? 오크 향입니다. 정말 좋은, 최상의 와인은 그 오크통의 질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새 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부대'의 향기를 품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에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뛰어난 리더가, 얼마나 교양 있고 능력 있고 실력 있고 부유한 사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공동체가 새 부대에 담겨서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닮아가고 있는가,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사나교회가 10년이 됐습니다. 10년 치의 향기가 바로 지금 이 모습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감사하면 감사하는 대로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요? 하사나교회는 그리스도라는 그 부대에 담겨져 있으니까요. 우리가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제 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닮아가는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세워지기까지 그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부어주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내가 변화되어서, 내가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정을 변화시켜야지'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항상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죠. "내 아내가 변화되면, 내 자식이 변화되면, 내 남편이 변화되면 뭔가 달라지겠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공동체에서도 "이 공동체에 누가 변하면, 누가 새로 오면 이 공동체가 변할 수 있을 텐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무엇이 모인 곳이죠?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죄인들이 더 나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그 회개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와 영광을 서로 고백함으로 함께 농익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우리의 향기를 덮는 일들입니다. 저는 하사나교회 공동체에 그런 일들이 풍성하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생각을 안 했는데,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카톡 메시지를 하나 보내주셨습니다. "목사님, 잘 돌아오셨습니까? 이제 앞으로 목회 제2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 카톡을 받고 '목회 2기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에 저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좋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렀던 것처럼 하사나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작게는 우리의 가정들이 '새 부대'에 담겼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시대의 원리에 맞춰 나를 의지하거나 다른 구성원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그리스도로 채워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히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잔치입니다. 저는 하사나교회 공동체에 일주일에 한 번씩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사나교회 공동체의 큰 잔치가 능력 있고, 회복이 있고, 기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정으로 돌아가셔서 그 가정에서 매일같이 또 다른 잔치가 일어나고, 그 잔치가 결국 주일을 소망하게 하며, "내가 주일날 하나님 앞에 또 큰 잔치를 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더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고백이 반복되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가정,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하사나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는 늘 가위바위보에서 이겨서 뛰어난 사람을 뽑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 같은 존재를 뽑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공동체는 결국 나 같은 존재,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무능력한 자가 모여 이루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은혜가 임하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진다고 주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약속을 우리가 목격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해달라고,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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