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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4장 1-13절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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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장 1-4절
4: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셔야 했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 왜 굳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을까?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뭐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셨을까요? 그냥 하늘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들 죄를 용서해 줄게”라고 말씀하시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왜 굳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까요? 왜 굳이 광야에 나가셔서 40일 동안 주리셔야 했을까요? 만약 이 본문을 보고 어떤 분들이 ‘아, 나도 예수님처럼 40일 금식 기도를 해야겠다’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단순히 흉내 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신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신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과,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광야의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광야’라는 곳이 어떤 곳일까요? 혹시 광야에 가보셨습니까? 우리는 흔히 사막 같은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지금의 요단강 근처 광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막보다는 돌덩이가 많은 황무지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나 찬양 속에서도 광야가 가진 이미지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아무런 소망도 없으며, 외롭고, 춥고, 고독한 곳. 왠지 기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만 같은 바로 그곳에, 예수님께서는 왜 가셨을까요?

어떻게 보면 이 광야의 시험은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광야로 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 사이에는 저희가 지난주에 살펴본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가 있습니다. 족보는 예수님의 기원이 어디이며, 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아주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든 복음서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위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어떤 의미에서, 광야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냥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라고 기록합니다. 지금 광야로 가시는 이 일을 누가 인도하고 계십니까? 바로 성령께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누가는 왜 의도적으로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에게 이끌린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는 장면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 드러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은,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의도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기록한다면 이 성경에 다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광야에 가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감정적이고 분위기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특별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 계셨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일’이라는 숫자와 ‘광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연상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출애굽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가 주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이 광야가 성도들의 구원의 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다시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가신 일, 요단강을 건너는 세례 장면, 그리고 지금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시는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애굽에서 죄인처럼 살다가 유월절을 지나 홍해를 건너고, 40년 광야 생활 끝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지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구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 또한 세상에서 죄인처럼, 마귀의 자녀처럼 살다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유월절의 기쁨을 누리고, 세례를 통해 홍해를 건너는 경험을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곧장 천국에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살아갑니다. 이 땅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광야에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광야 사건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해석될 때, 그 상징적 의미는 광야 같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광야의 의미는 참 애매모호한 것 같습니다. 그곳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불편한 곳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은 죄의 형벌로 광야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매일같이 만나를 먹는 은혜를,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지지 않았고 신발이 닳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분명 광야는 죽음과 혼돈, 절망을 상징하는 곳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심판받아 버림받아도 마땅한 그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갑자기 마귀가 등장하여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첫 번째 시험은 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우리는 이 시험을 들으면 40일을 굶으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배고프셨을까 생각하며, 단순히 그분의 배고픔을 이용한 시험이라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달랐습니다.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기서 ‘기록된 바’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계심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2절에서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전,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2세대들에게 과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는지를 회상하며 전하는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이죠.

신명기의 말씀처럼, 1세대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우리 역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바로 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라.”

떡과 만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떡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누가 더 많은 떡, 즉 돈과 권력을 가졌느냐로 성공을 판가름합니다. 그러나 만나는 다릅니다. 만나는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둘 수 있었고, 다음 날이면 썩어 버렸습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이 편해지지만, 만나는 쌓아둘 수 없습니다. 결국 만나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나 자체가 아니라, 만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돈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것은 단순한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을 세상적인 방식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입니다. 상식적으로 배고픈 자에게는 떡이 필요하고, 세상은 부족함을 그 자체로 채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만드는 능력을 행하시는 대신, 그저 굶주림을 견디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참으로 큽니다. 예수님의 광야 생활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광야의 삶을 미리 경험하신 것입니다. 성도에게 이 세상은 광야와 같은 삶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인생이 비단길을 걷고 있거나 세상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면, 어쩌면 그 인생이 무언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본향이 따로 있다고 말하기에, 그곳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은 우리에게 광야일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의 삶이란 때로 하나님 때문에 손해 보고 밑지는 장사를 하는 것이며, 부자가 될 능력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미리 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배고픔과 질병, 불편함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에서 결핍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짜증 내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 결핍은 돈, 건강, 명예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며, 우리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결핍을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운다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담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지만,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 때문에 실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적인 능력으로 증명하라는 마귀의 요구에 순종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웁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공으로, 문제 해결 능력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첫째, 광야의 삶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내가 광야를 걷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신앙의 여정을 돌아보면, 광야를 깨닫게 하셨던 그 순간들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불편하고 원망스러웠지만,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야는 어떤 이에게는 불평의 장소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그곳을 은혜의 장소로, 그분의 손길을 경험하는 축복의 장소로 바꾸신다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황무지 속에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샘물을 경험하는 존재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 샘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광야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 속에서 샘물을 터뜨리시고 끊임없이 만나를 주시며,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은혜의 시간이 됩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잠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할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시험과 유혹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 시험을 내 힘과 능력으로 증명해 보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세상의 요구를 증명하는 삶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누리는 삶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돌을 떡으로 바꿔달라고 주야장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으셨던 그 길을 뚜벅뚜벅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갈 때, 우리의 영혼은 새롭게 되고 광야에서 샘물이 솟아나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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