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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3장 23-38절 예수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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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3장 23-38절
23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삽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24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안나요 그 위는 요셉이요 25그 위는 맛디다아요 그 위는 아모스요 그 위는 나홈이요 그 위는 에슬리요 그 위는 낙개요 26그 위는 마앗이요 그 위느 ㄴ맛다디아요 그 위는 서머인이요 그 위는 요섹이요 그 위는 요다요 27그 위는 요아난이요 그 위는 레사요 그 위는 스룹바벨이요 그 위는 스알디엘이요 그 위는 네리요 28그 위는 멜기요 그 위는 앗디요 그 위는 고삼이요 그 위는 엘마담이요 그 위는 에르요 29그 위는 예수요 그 위는 엘리에서요 그 위는 요림이요 그 위는 맛닷이요 그 위는 레위요 30그 위는 시므온이요 그 위는 유다요 그 위는 요셉이요 그 위는 요남이요 그 위는 엘리아김이요 31그 위는 멜레아요 그 위는 멘나요 그 위는 맛다다요 그 위는 나단이요 그 위는 다윗이요 32그 위는 이새요 그 위는 오벳이요 그 위는 보아스요 그 위는 살몬이요 그 위는 나손이요 33그 위는 아미나답이요 그 위는 아니요 그 위는 헤스론이요 그 위는 베레스요 그 위는 유다요 34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요 35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36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37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세컨드 제너레이션, 즉 이민 2세대들을 보면, 미국에서 이민자의 자녀로 살아갈 때 어렸을 때는 당연히 자신이 미국 사람인 줄 압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면서 '나는 정말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제 딸아이 같은 경우에도 종종 "아빠는 어땠어?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는 어디에 사셨어?" 와 같은 질문을 자꾸 합니다. 왜냐하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의 조상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족보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조상 중에는 왕이 계십니까? 아니면 한국의 위대한 영웅이 있습니까?

저는 오늘 이 족보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이 평생 들어왔던 혈통의 기원이나 정체성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영생의 족보를 확인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고 고백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있는 족보는 조금 독특합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하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을 부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는 것,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처음부터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한참 뒤,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본 것처럼 조금은 의아한 상황에 이 족보를 넣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는 그 중간에 족보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출생 시작부터 그분이 다윗의 계보를 잇는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반면, 누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즉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시점에 이 족보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에는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와 같이 조상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입니다. 유대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더 큰 차이점은, 마태복음이 요셉의 족보였던 것에 반해, 오늘 누가복음의 족보는 조금 다릅니다.

본문 23절 후반부를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소개한 뒤,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헬리라고 말합니다. 왜 다를까요? 당연히 궁금해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누가가 의도적으로 요셉의 족보가 아닌, 마리아의 족보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유대인이 아닌 온 열방을 향해 이 복음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누가가 쓴 책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권이며, 이 두 책은 원래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누가가 쓴 글의 최종 목적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즉 복음의 전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나 다윗의 자손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까지 이어지는 모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려는 것이 누가복음 족보의 의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족보를 통해 우리가 붙잡아야 할 두 가지 핵심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어디서 시작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그 위는" 입니다. 예수님의 기원을 찾아 "그 위는, 그 위는, 그 위는…" 하고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창세기에 들었던 므두셀라, 셋과 같이 익숙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족보의 첫 번째 끝이 어디인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누가는 의도적으로 인류의 시작인 아담에게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시작이신 아담으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은 민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로 갔지만, 누가는 왜 인류의 시작인 아담에게로 갔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인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지키고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아담을 두시고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창조 계획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었고, 그 나라에 이르기 위해 아담에게 요구된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담이 그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결과가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선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는 우리에게 첫째 아담의 실패한 인생을 먼저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고통 속에 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남 탓하기를 좋아하는데, 한번 남 탓을 해봅시다. 누구 때문일까요? 바로 아담 때문입니다. 아담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 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와가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담이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의 왕과 제사장으로 세우셨기에,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고 자기에게 주었을 때 아담은 그것을 거부하고 하와를 데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에덴동산을 지키지 못하고 함께 범죄함으로 인류의 역사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마리아의 혈통으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심판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지만, 그 과정 속에는 놀라운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내쫓으시기 전에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히려면 어떤 동물의 희생, 즉 대속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창세기 3장 15절, '원시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하시는 내용 속에는,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인류를 향한 은혜의 언약이 담겨 있습니다.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 즉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지은 것도 바로 이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아담과 하와는 장자인 가인을 통해 회복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 즉 '여인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가 오실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누가는 이 족보를 통해 바로 그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 2장을 보면 요셉보다 마리아가 훨씬 더 많이 등장합니다. 이는 누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된 메시아를 넘어, 첫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된 모든 열방을 구원하실 구세주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약속의 성취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기록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아담에게 주어졌던 약속, 즉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이 족보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둘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 족보의 끝이 아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38절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누가는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족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아담의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고난입니다. 세상의 고난은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없지만, 성도의 고난은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난은 이 세상에서 풀어야 하지만, 우리의 고난은 하늘의 것으로 이 땅의 고난을 푸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전,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문제를 해결하실 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불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족보 뒤에, 마귀가 예수를 광야로 이끌고 가 시험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시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나아가 예수님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인류의 실패와 비교됩니다. 예수님 이전의 인류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짐을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졌던 관계가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첫째 아담에게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첫째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에게 속한 모든 자는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증언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아담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분은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되셨습니다. 이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족보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기원은 더 이상 첫째 아담이 아니라, 둘째 아담에게 있습니다. 둘째 아담에게 속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일어나고, 함께 승천하였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둘째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다. 양자의 영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족보는 변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김 씨, 박 씨, 최 씨 가문을 자랑하거나, 우리 집안이 명망 있는 가문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둘째 아담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뿐만 아니라, 그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지금도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그분의 통치 아래 우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 됨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니 고난 주간이라고 해서 기쁨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마치 수도승처럼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하늘의 것들을 누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원이 둘째 아담에게로 옮겨졌기에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몇 사람이나 들었을까요? 많은 이들이 듣지 못했기에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의심하고 문제 삼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도 "이는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즉 둘째 아담에게 속해 있을 때, 세상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하는가?" 라고 도전해 올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성도들이 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음을, 우리의 기원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삶으로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겸손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해 나갈 때, 결국 세상이 우리를 알아보고 성도가 서로의 성숙함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하사나교회 공동체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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