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1-9절
9:1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7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9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오늘 저희가 함께 볼 말씀을 통해 여러분께 묻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능력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떠한 권위를 갖고 싶으십니까? 이런 질문에 여러분은 당연히 "네, 그렇습니다. 저에게 능력이 있어서 사회에 이바지하고 우리 가정을 지킬 수 있는 그런 능력과 권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실 겁니다. 그리고 2025년을 시작하시면서 여러분이 계획하셨던 내용 가운데 많은 부분이 '내 능력을 어떻게 증가시킬 것인가?', '내가 좀 더 권위 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룰지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정말 이 제자들처럼 이러한 권능과 능력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저 역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병 고치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면 제 목회가 너무나 기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을 좀 다른 방향에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분명히 집중하는 부분이 각자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병 고치는 능력, 귀신 쫓는 능력이 과연 이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실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왜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는가?'라며 전도 여행에서의 태도에 관심을 갖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혹은 전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관심을 갖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아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하나에만 집중할 때가 있는데, 사실 이 내용들을 모두 아우르기 위해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의 시작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9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신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후 저희가 지난 몇 달 동안 살펴본 것처럼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제자를 세우신 다음 6장부터는 평지 설교를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설교를 통해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공동체가 새롭게 시작되는데, 옛 시대와 새 시대가 어떻게 분별되어야 하는지, 새로운 예수님의 가르침인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선포되는 것을 저희가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고 누가복음 강의를 하면서, 과거에 생각했던 것과 좀 다른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씨 뿌리는 비유'가 그저 하나의 비유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누가복음을 강의하면서 이 비유가 상당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라고 하면 흔히 능력이 배가 되고 권위가 더 많아지는, 새로운 시대의 아름다움과 영광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는 새로운 시대를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기적일까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가 살펴봤던 것처럼 좋은 땅에 씨앗이 뿌려져 백 배의 열매를 맺는 것만을 바라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가복음을 강의하면서 지적했던 부분이 무엇이었죠? 우리가 좋은 땅이 아니라 길가와 같은 땅이었는데, 그 길가에 씨앗이 뿌려졌는데도 열매가 맺혔다는 것입니다. 바위에 씨앗이 뿌려졌는데 거기서 열매가 났다는 겁니다. 가시덤불에 씨앗이 뿌려졌는데 거기서 열매가 난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적이고, 이것이 새로운 나라의 영광의 모습이며, 그것 자체가 복음이라는 것을 지금 누가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주에 살펴볼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와 신앙생활을 오래 하셨던 분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두 번 이상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오병이어 설교를 할 때마다 강조했던 것이, 이것이 양적인 기적이 아니라 장소적 개념과 상징성을 지닌 사건, 즉 천국 잔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자, 한번 잘 보십시오. 5장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9장 1절에서 제자들을 보내시고 나서, 제자들의 부름에 화답한 수많은 군중이 예수께 모였을 때, 그것을 천국 잔치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냐면, 이것은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천국에 가기까지, 천국 잔치를 하기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2000년 전 열두 사도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현재 천국 가기를 바라고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라고 간구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기를 소원합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시려고 '내보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 옆에서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듣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들을 내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입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이는 개념이 참 많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게 '모이라'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성경 공부에 모이고, 어떤 행사에 모이고, 자꾸 모이라는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그런데 모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임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다시 흩어져야 하는 것, 즉 '내보내심을 받는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모이는 것, 교회로 모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여서 받은 은혜를 가지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모여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좀 더 행복하고 즐거운 공동체가 될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흩어짐을 받는 것, 내보냄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디로 내보냄을 받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으로, 여러분의 직장으로, 여러분의 사업체로, 여러분이 있는 사회로 내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내보냄을 받아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자 됨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능력과 어떤 권위를 주셨습니까? 귀신을 제압하고 병을 고치고 앓는 자를 고치는 권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새로운 것일까요? 우리가 내보냄을 받았을 때 받는 이 권위들에 대해, 오늘 본문을 이해할 때 현재 모든 성도에게 이러한 은사와 권위가 주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는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신유의 은사 같은 것들은 열두 사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사도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이 사도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려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목적은 구원이 임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 즉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칠 때, 그것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구원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을 통해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6절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이것이 결말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9절까지 누가는 의도적으로 헤롯이라는 왕을 등장시킵니다.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누가 참 목자인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분봉왕 헤롯이 지도자처럼, 참 목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목자이고 헤롯은 거짓 목자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 헤롯이 말하는 내용을 한번 잘 보십시오.
1절부터 6절까지를 보면, 보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이 모든 능력과 권위로 사람들에게 행했던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모든 집중은 제자들에게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 제자들의 전도 여행에서 주인공이 제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들으면 '아, 나도 제자처럼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능력과 권위가 어떻게 나타날까에 관심이 쏟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는 의도적으로 헤롯 왕을 등장시키면서 그의 고백을 이야기합니다. 7절에 보면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들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문맥상 헤롯이 들었던 것은 제자들의 전도 여행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가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의 전도 여행이 아니라 헤롯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헤롯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구인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 여기서 '이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우리에게 '잠깐 오해하지 마세요. 이 전도 여행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닙니다. 인본주의 사회에서 이 말을 받아들이기는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주인은 나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들의 인생의 주인공은 누구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을 보면 그 주인공이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 대단하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정말 하나님 나라에 큰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고백 속에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유하거나 가난한 것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왜요?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그것을 전제로, 지금 누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가가 이야기하는 그 권위와 능력은 누구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누가는 우리에게, 제자들에게서 나오는 그 권위는 예수님이 그들을 보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을 제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나오는 능력이라는 점에 집중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대체 무엇을 간구해야 할까요? 우리는 모두 능력과 권위를 원하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좀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봤을 때 "아, 저 사람 권위가 있어", "아, 저 사람 능력이 있어" 그런 말을 들을지라도, 우리는 그 권위와 능력이 누구로부터 왔다고 고백하는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다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은 권위, 내가 누리고 있는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내 것이 아니니까요. 다른 말로 얘기하면, 내 인생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성경 한 권을 더 썼습니다. 그 성경이 혹시 어떤 성경인지 아십니까? 사도행전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사실상 1권과 2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교회에게 주어지는 사명에서 다시 한번 발견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시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의한 내용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옵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제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확장되어 펼쳐지는 교회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누구의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이야기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권위와 능력을 주시고 제자들을 내보냈다는 말을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성령이 임하는 삶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성령 충만함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여러분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는데, 예수님께서 그냥 홀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보내신 것입니까? 성령과 함께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리심 안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성령과 함께하는 삶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얼마나 큰 권위와 능력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홀로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존재의 의미가 세상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우리가 천국 가기 전에, 천국 잔치를 풍성히 누리기 전에, 우리가 사도행전의 삶을 살게끔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이 사건을 여기에 집어넣는 것 같습니다. 천국 가기 전에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와 함께, 누구의 권위로, 누구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어서 보내셨습니까? 성령의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 자조적이고 절망스러울 때가 좀 있습니다. 내게 가진 것이 없으니까요. 특별히 20대는 가진 것이 없어도 '내가 뭔가 이루면 되지'라는 생각에 그런 것이 상관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상이 나를 비교하기도 하지만, 내가 세상과 비교할 때가 참 많습니다. 친구들과 비교하고, 내가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보잘것없고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그건 맞지 않아'라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보면 그것이 비수같이 나를 찌를 때가 많습니다. '정말 그래?', '정말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 '그것이 너의 정체성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그건 아니잖아'라며 수도 없이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절망시키는 것이 어떻게 보면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셨습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놀라운 능력과 권위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의 행복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멋있는 말 아닙니까? 저는 이 말이 참 멋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을 성도로서 좀 세워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정이 그랬으면 좋겠고, 하산학교 공동체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커리어가 어떻게 되고, 내 인생이 무엇을 남기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이 어떻게 대대손손 잘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이루어지고 나타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인생 속에서, 우리의 가정이, 이 교회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최선의 목적으로 삼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5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반응에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5절에 이렇게 이야기하죠.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결과 중심적입니다. 제가 강도사 고시를 봤을 때 "당신은 지금까지 몇 명을 전도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참 담대했죠. 저는 "제가 몇 명을 전도했는지 잘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터뷰할 때 목사님들한테 엄청 혼났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결과 중심적입니다. 내가 도대체 몇 명을 전도했는가?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봉사와 하나님의 나라 일을 하는가? 내가 지금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한 것들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내 무능함이 드러날 때 우리는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5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를 영접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위로가 되는 게, 우리가 전도하면 이 좋은 것을 알아봐 줘야 하는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열 번 하면 거의 열 번 다 거부하잖아요. 정말 그런 말씀 참 많이 하십니다. "목사님,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심 쓰고 싶은 일 하기 싫어요. 다 오해하고, 내가 선심 써봤자, 내가 정말 착한 일 해봤자 나만 바보 되고 나만 손해 보는데 이거 더 이상 하기 싫어요."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요? 그들이 다 나를 거부하고 심지어 나를 바보 취급하고 나의 뒤통수를 치는 일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경험하니까요.
그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게 무엇입니까?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니까 너희는 무엇을 하라고요? 이걸 아주 속된 말로 얘기하면, 입 다물고 하던 일이나 하라는 겁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불평하지 말고 그냥 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만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을 어떻게 충실히 하느냐,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예수님을 전하려면 뭔가 좀 열심히, 많이, 뛰어나게 잘 설명하거나 내가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예수를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3절에 보면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희가 전할 것, 너희가 의지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교회가 힘이 없는지 아십니까? 왜 교회가 타락했는지 아십니까? 세상에서 교회가 타락하고 힘이 없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너무 우리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이 혹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예수를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 점심이 맛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서 혹해서 와도, 그 사람이 예수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점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진수성찬을 대접해도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정말 좋은 사람들만 모여.' 여러분,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공동체를 열망하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 오니까 나 거기 갈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좋은 공동체를 만나도 예수를 못 만난다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집중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의 겉모습, 우리의 열심을 보여줄까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찾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찾아가지 않는 이유는 여러분도 수도 없이 댈 수 있고, 저도 수도 없이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도행전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너희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세상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 자체는 결국 이 세상에서 증인이 되는 것, 결국 찾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만큼 더 많이 찾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지 아십니까? 찾아가기 위한 에너지, 찾아가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찾아가겠습니까? 내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찾아가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더 알지 못하면 어떻게 찾아가겠습니까?
두 번째는, 우리가 잘못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 내 능력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내 것은 다 내려놓고 뭐만 전하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라고요.
이 일들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제자들은 이 전도 여행을 통해서 미리 맛보는 예행연습을 했습니다. 예행연습을 할 때 그들은,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좀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찾아온 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우를 범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의 문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가 행복하지 않겠냐고 예수님 앞에 말할 때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행전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온전히 깨달았을 때, 그들이 했던 것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요구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배고픔 안으로 사도들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들의 세상의 고통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세상의 어려움 속으로, 어둠 가운데로 그들은 들어갔습니다. 왜요? 빛이신 예수가 성령 충만함으로 그들의 인생을 바꿔 버렸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평불만인데 우리에게는 자족함, 즐거움, 그리고 인내를 통한 소망으로 이끌고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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