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22-25절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여러분, 기적을 믿으십니까? 기적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나는,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날 때를 말합니다.
사실 목회를 하다 보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그 기적의 통로가 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신유의 은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뼈저리게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기적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기적을 원하고, 기적을 바라는 우리의 삶이 드러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그 표면적인 기적,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가족’이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이미 언급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듣고 행하는 자가 바로 당신의 새로운 가족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2천 년 전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가족이십니까?" 라는 질문에 우리는 "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오늘 기도 중에 고백했던 것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지키려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 됨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 됨의 증거 안에서 우리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아멘으로 화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과학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이미 기적이 주어졌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이 가진 풍성한 의미를 경험하는 것이 또 다른 복임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허락된 자, 들을 귀 있는 자,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보고 깨닫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적이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23절은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합니다. 거센 바람과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단순히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나 믿음 없는 제자들을 꾸짖고 광풍을 잠재우신 기적으로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구약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거하고, 궁극적으로 그 증거가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주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구약에서 배에서 잠자고 있던 한 사람이 기억나십니까? 바로 요나입니다.
오늘 사건은 예수님과 요나의 이야기가 매우 유사하면서도,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이 유사성과 대조를 통해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베푸시는 기적이 어떤 의미이며, 그 기적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기적의 혜택을 받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말씀이 싫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니느웨 사람들은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원수가 심판받는다는 것은 좋은 소식처럼 들릴 수 있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그 말이 듣기 싫었던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요나도 배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왜 잠을 잤을까요? 평안해서, 혹은 피곤해서 잠을 잤을까요? 예수님이 잠드신 것과 요나가 잠든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호수를 잠재우실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에 어떤 환난이 닥쳐도 평안하실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사소한 일이 계획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불안에 떨고 근심이 많아져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왜 잠을 잤을까요? 저는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도 편히 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룬 적이 있으신가요? 오히려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가지고 있는 것이 무너지려 할 때 우리는 잠 못 이룹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순종 앞에서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죄에 대해 무감각했습니다. 똑같이 배에 큰 풍랑이 일었지만, 한쪽에서는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 평안히 주무시고 계셨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음에도 죄에 무감각하여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절망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잠자는 것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은 모습입니다.
요나의 이야기에서 풍랑이 일자 선원들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배 밑에서 자고 있던 요나를 깨웁니다. 그때서야 요나는 이 풍랑이 왜 왔는지 깨닫고 "이것은 나의 잘못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종종 악과 어둠,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것은 그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 즉 그의 죗값을 죽음으로 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죽어 마땅했던 요나가 3일 만에 살아났다는 것, 그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요나에게 베풀어졌던 그 은혜가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 왕에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표적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 표적은 단순히 눈앞의 적들로부터의 구원을 넘어,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한 궁극적인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 오실 메시아,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 또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광풍이 불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외칩니다. 이는 우리의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기에, 죄라는 광풍이 몰려와 양심을 찌를 때 "하나님, 저는 죽을 죄인입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이는 바다로 상징되는 사망의 권세와 죄와 어둠을 꾸짖으신 것이며, 믿음이 적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다가 잔잔해졌다는 것은 더 이상 사탄과 마귀가 우리를 심판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기적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사망의 권세도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나라에서 영생을 소유한 자로 옮겨졌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놀라며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여 순종하게 하는가"라고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 권위를 찬양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 새로운 생명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부활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믿음을 소유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을 넘어, 미래에 주어질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소망’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크리스천이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세상이 무너질 때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천국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무너져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과 희망이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이것은 내 의지로 만들어내는 미약한 소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거대한 하늘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내 힘과 의지가 아니며, 사람의 사랑도 아닙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랑은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줄 수 있는 희망은 결국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분은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논리와 상식, 원인과 결과를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이 땅의 시스템에, 혹은 교회의 겉모습에 희망을 두지 마십시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소망은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를 보는 순간, 우리가 가진 절망은 뒤엎어지고, 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소망과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고, 폴리카르포스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극심한 고문 끝에 화형을 당하면서도, 폴리카르포스가 담대히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그 순교는 축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그런 하늘나라의 소망,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지금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최근에 아버님을 뵙고 왔습니다. 처음 찾아뵈었을 때는 살이 하나도 없이 앙상해지셔서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아버님 생신인 크리스마스에 맞춰 퇴원하셨고, 다시 찾아뵈었을 때는 너무나 좋아지셨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삶을 연장시켜 주신 데에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고, 손주 손녀들이 할아버지를 위해 더 기도하게 하시며, 함께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천국의 소망이 이 땅에 남은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손주들에게도 큰 유익입니다. 기도하면서 어릴 적 할아버지가 품에 안아주셨던 그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는 여러 기적이 나옵니다. 세상은 병이 낫고 바다가 잠잠해진 기적 자체에만 주목하겠지만, 성도들은 그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봅니다. 그리고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그 소망을 함께 품고 이 땅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앞에 나왔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기억해 봅시다. 좋은 땅에만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길가에, 돌짝밭에,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뚫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말씀은 그 모든 것을 뚫고 열매 맺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기까지 왔습니다. 2025년도 녹록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교회의 크기나 사람의 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공동체가 2025년에 우리에게 주어진 싸움을 함께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이겨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갖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기에,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2025년,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기도 제목들을 두고 다른 것에 집중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소망으로 함께 품고, 함께 싸우고, 함께 이겨내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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