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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2장 21-39절 울법 아래에 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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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21-39절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 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또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여러분은 어떤 것을 간절히 열망한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열망하는 것,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원하고 바라는 것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 원하는 것들을 우리는 열망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열망의 방향성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일, 저희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 이야기 속에서는 어떻게 보면 예기치 못한 기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목자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고 목자들 스스로도 상상할 수 없었는데, 천사들에게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자에게는 얼마나 예기치 못한 기쁨이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사실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 또한 우리에게 예기치 못하게 왔습니다. 우리가 계획한 것도 아니었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냥 부어주신 것이거든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러니 우리에게 분명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예기치 못한 기쁨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를 만나게 되는 예기치 못한 기쁨은 정말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겠죠.

그런데 저희가 지난주에 살펴봤던 그 본문 다음에, 오늘 본문의 시작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할례할 팔 일이 되매"  
이제 유대 관습상, 전통상 8일째 되는 날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 할례를 받을 때쯤 일어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례가 무엇인지, 또 그 할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저는 오늘 이 두 사람에게 좀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는 시므온과 안나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사람은, 목자의 예기치 못한 기쁨과는 좀 결이 다른 감정들이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뭘까요? 어떻게 보면 조금 전에 저희가 보았던 그 할례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언약의 증표거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리라. 그리고 너로 말미암아 수많은 백성들을 이루게 하고, 너에게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는, 아브라함의 축복에는 땅과 그리고 후손이라는 놀라운 축복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있은 다음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언약식 같은, 계약식 같은 모습을 창세기 15장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분이라면 수도 없이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두 언약의 당사자가 하나님과 이런 언약식을 하고 있는데, 그 언약식의 모습은 근동 지방에 있었던 언약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큰 왕과 작은 왕이 지금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얼마나 진중하고 무거운지를, 짐승을 가지고 와서 두 동강으로 잘라버립니다. 쪼개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왕이, 즉 지금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사실은 그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면서 "내가 이 언약을 지키겠습니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이 그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저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은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이 아브라함의 언약 다음에 어떤 일이 나오냐면 이 할례를 행하는 일이 나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할례를 하게 하셨느냐? 그 할례를 행하는 이유는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던 그 사건 다음에 할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실 언약을 어겼으면 아브라함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죽이지 않고 아브라함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고 그리고 그것이 은혜 언약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 할례거든요. 그러니까 이 할례의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할 때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이거든요. 얼마나 축복된 것입니까?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것과 달리 이스라엘에게는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이 사이를 400년 암흑기라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고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의 탄생은 어떤 의미에서 기쁜 소식이죠. 우리가 너무나도 이야기 전하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예수님이 하필 2000년 전에 오셨냐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을까요? 왜 헤롯이 다스리는 그 시대에 오셨을까요? 성경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때가 하나님의 계획에 맞는 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질 수밖에 없는 가장 정확한 시기였다는 거죠. 그걸 다른 표현으로 얘기한다면,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언약을 순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여러분이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시므온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죠. 그런데 성령이 임하셔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2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시므온은요,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인데, 그리고 경건한 자인데,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자였다고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그러면 이스라엘의 위로가 뭘까요, 여러분?

자, 이것을 우리에게 좀 적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것, 돈일까요?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게 건강일까요? 여러분의 위로가 되는 것이 가족의 행복일까요? 예, 세상은 그렇다고 얘기합니다. 세상은 돈으로 위로를 받고, 그리고 성공으로 위로를 받고, 가족의 행복으로 위로를 받아요.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의미는 결국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함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에 있었느냐,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400년 동안 암흑기에 있었고 심지어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지금 무엇을 해야 될까요?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표현으로 보면, 남은 자로서 "언제까지니이까"라고 외치고 있는 자와 동일하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희는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얘기하고 있는 남은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엇에 애통해하고, 무엇을 갈망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 여러분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부를 열망하고, 우리가 건강을 열망하고, 우리가 행복을 열망하고, 그것들만 열망하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망해야 하는 건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애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할 것을 우리는 간구해야 되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기록되고 있는 안나의 모습 속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36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다고 얘기해요. 그런데 그 안나라는 선지자를 표현하고 있는 내용을 보시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러니까 나이가 많았다는 그 의미가 지혜롭고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풍파 경험을 가졌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뵐 날이 가까웠다는 표현도 되겠죠. 그러면서 그녀를 표현하는 것도 이렇게 얘기해요.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무엇을 얘기하고 있느냐 하면, 이 안나를 표현하였을 때 그 인생에서 하나님 앞에 아뢸 것이 정말 많은 것처럼 표현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녀가 하고 있는 내용들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얘기해요. 이 안나 선지자의 기도의 내용이 뭘까요? 과부로서 84년 동안 남편 없이 정말 살았던 그녀의 인생. 여러분, 이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 시대에 홀어머니의 삶이 아니에요. 여러분, 이 시대에는 더 심각한 경제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는 지금 우리가 홀어머니로, 홀로 살아가는 싱글 과부로 살아가는 그 인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치와 모멸감과 정말 한계를 겪고 살아갔던 그 여인이, 성전에서 매일 아침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했었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정말 애절하겠죠. 성경에는 의도적으로 과부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과부들이 항상 성전에서 끊임없이 애타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약간 실수하고 있는 것들이 뭐냐면, "맞아, 우리가 어떤 일들이 있으면 금식하고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해." 이 정도로 결말을 맺는 것 같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그녀가 그 기도의 응답을 어디서 찾았냐면, 38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누구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다고요? 그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어요. 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그는 누구죠? 38절 앞부분에 뭐라고 얘기해요?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누구를 만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그녀가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섬겼었던 내용은 그녀의 사사로운 평안을 위한, 그녀의 사사로운 부유함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무엇에 대한 기도였어요? 무엇에 대한 금식이었어요? 메시아의 오심,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설교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기치 못한 기쁨에 머물러 있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목자처럼 말이죠. 목자였으면 참 너무 큰 경험을 했었던 거죠. 상상하지 못했던 메시아의 오심을 들었고, 천사를 통해서 그것들을 들었고, 듣는 것만이 아니라 찾아가서 보고, 그리고 그것의 의미를 깨달았던. 근데 사실은 저희들 또한 이러한 못지않은 예기치 못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성령의 증거로 예수를 만났어요. 성령의 증거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남을 통해서 그 풍요로움을 경험했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저는 오늘 본문에 기록되었던 이러한 기도와 이러한 갈망과 이러한 절실함이 있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무엇에 대한? 메시아가 다시 오심에 대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메시아가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율법 아래에 태어났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얘기해요. 21절에 보면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그리고 나서 22절에 이렇게 해요.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지금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에 따라 이 일들을 하셨다고 얘기해요. 이게 우리는 "그럴 수 있겠지"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럼 잘 생각해보세요. 과연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 지난주에 저희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 왜 예수님께서 여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왜 강보에 싸여 구유에 계셨을까? 그 답을 우리가 찾아야 사실은 이 예기치 못한 기쁨의 그 깊이와 그 풍성함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거죠.

단순히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셨다, 우리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었어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듣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머릿속으로 '아, 예수님 인간의 몸을 입으셨어.' 너무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자체는 놀라운 일이에요. 근데 오늘은 그 놀라운 일을 더 놀랍게 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어요. 예수님께서 율법이 정한 대로 그 일들을 다 순종하셨더라.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참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하셨으면 좋겠어요. 특별히 성경을 읽으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답을 여러분이 얻었을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행복감이 찾아와요. 하늘나라의 풍요로움이 찾아와요. 그 '왜?'라는 답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4절부터 5절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때가 차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때가 차매'라는 그 단어 아래에 저희가 지난주와 오늘 본문에서 얘기되었던 그 내용들을 담고 있는 거예요.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셨다, 때가 차매 8일 되는 날 예수님께서 율법이 원하는 대로 할례를 받으셨다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해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그다음부터 중요한 거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서 이 모든 걸 행하셨냐고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뭐 하신다고요? 속량하신다는 거예요. 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여러분, 이거 하나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뭐냐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겠지"라고 우리는 오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실은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을 그토록 질책했었어요. "너희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로, 너희가 할례를 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너희는 천국이 너희 것인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냐면, 율법이 너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 알 때 이것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율법이 주는 유익이 뭘까요? 여러분, 십계명이 여러분에게 주는 유익이 뭘까요?

자, 유익이라고 하면, 정답으로 얘기하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어요, 없어요? 율법을 잘 지키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어요, 없어요? 점점 어려워지시나요, 질문이? 자, 분명히 하나님께서 "너희가 이것을," 신명기 28장이 얘기하면 "너희가 이것을 지키면 너희는 뭐 한다고요? 복을 받는다"고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모세에게 준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고 얘기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어요. 문제는 뭐냐면, 그 법을 지킬 수 있나요?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모세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을 나오게끔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율법 아래 있다는 건, 궁극적으로 왜 시므온과 안나가 그렇게 기도하고 왜 그렇게 메시아를 열망했었던가, 그 이유가 뭐냐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의로운 그 시므온이, 경건했던 그 시므온이 왜 메시아를 기다렸겠어요? 여러분, 오해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내가 의롭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잘 나가면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법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점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저는 청교도의 신학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그러나 청교도의 신앙 중에 제가 되게 도전받는 것, 제가 수도 없이 여러분들에게 얘기한 거지만, 그들은 죄의 문제에 있어서 되게 민감했어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소한 거짓말, 우리가 별거 아니라고 얘기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뒷담화, 우리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부도덕을 이 청교도 사람들은 심각하게 여겼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거룩함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 무섭게 나를 질책하고 나를 판단하기 시작하니까요.

그런데 소위 말해서 행위에 근거한 율법의 잣대, 율법의 시스템은 결국은 못 이루니까 어떻게 해요? "나는 신명기 28장에 따라 너희가 이걸 지키지 않으면 뭐가 주어진다고 얘기하죠?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고." 그러니까 모든 게 다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것들이 오히려 내 삶의 기쁨이 되지 않고 절망이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끔 돼버리는 상황이 돼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율법 아래에서 온전한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은 오히려 그 죄가 어떻게 해요? 하나님으로 가는 축복의 통로가 돼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은혜가 많은... 죄가 많은 곳에 무엇도 많다고요? 은혜가 많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그 '율법 아래에 있다'는 그 의미가, 왜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태어나셨냐? 무엇을 하기 위해서요? 누가 율법 아래 있는 자예요? 우리요. 죄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면 우리는 뭘 받을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자예요. 그런데 그 죄를 뭐 하시기 위해서? 속량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태어났다. 이것보다 큰 은혜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심지어 한 발자국 더 나가요. 사도 바울은 "너희가 죄만 속량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무엇을 주기 위해서? 아들 됨의 명분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예수님께서 할례 받으셨다는 그것이 너무너무 감사해요.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이 땅에서 사셨다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해요. 왜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원칙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그 원칙을 로마서 5장 17절에 이렇게 얘기해요. 이게 대표자의 원칙인데요, 로마서 5장 17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지금 사도 바울이 뭘 얘기하냐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즉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땅에 왔어요. 그리고 그 한 사람 덕분에 모든 죄 아래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의 다스림 안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사망이 왕 노릇 하는 세상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것이 결국 율법이 주는 절망감이란 말이에요.

제가 이제 '오직 예수'라는 주제로 1년을 살아가면서 제가 '작심 1일'을 하는 의도가 있어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작심 1일'을 완벽하게 지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365일이 끝난 다음에 "목사님, 저 정말 하루도,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이 프로젝트를 다 했습니다"는 일이 정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제가 이 일을 하는 의도는 뭔지 아세요? 그걸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우리가 아니라는 것, "나는 오늘도 실패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왜요? 그 고백을 통해서 누구를 찾게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거예요. 왜요? 그 속에 뭐가 있으니까? 은혜가 있으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가 내 인생에 밀물 듯 들어오고, 심지어 그것이 나의 삶의 원칙이 되어서 나는 하나님을 찾는 일들이 정말 거북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냥 목사님 생각해서 그냥 내가 지금 이걸 하고 있긴 하는데 기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니까 "이거 해봤자 소용이 없겠지"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여러분, 본래는 저도 그래요, 여러분. 저도요, 어떨 때에는 잊어버려서 놓칠 때도 있어요. 미팅에 들어갔다가 뭘 하다가 뭐 하다 보면 순간 놓쳐버리면, 어느 순간에 "어, 이거 놓쳤네." 여러분 다 아실 거 아니에요.

근데 중요한 것은 뭐냐면, 그런 우리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을 온전히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생명 안에 왕 노릇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돼버리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바뀌어버린 거예요.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불순종하기도 하고 실패하고 좌절함에도 불구하고, 누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 되심으로 말미암아 매 순간 내 죄가 속량됨을 경험하게 되는 거고,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내 인생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경험하는 거예요. 내 공로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경험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얼마나 큰 은혜가 있을까요? 얼마나 큰 기쁨이 있을까요? 이것보다 얼마나 큰 기적이 있을까요?

여러분, 시므온이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시므온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아세요? 29절에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이런 고백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제 내가, 이걸 다른 말로 얘기하면 "이제 내가 죽어도" 그 말이에요, 여러분. "내가 이제 죽어도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이것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이제 내가 천국에 사는 존재입니다"라는 얘기예요. 육신의 몸이 죽고 안 죽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내가 지금 영원히 사는 그 삶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 인생 속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뭐예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우리의 삶 속에서 고백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알아요.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거. 내가 매번 실패하고 좌절하고, 그런데 성령께서 늘 우리에게 도전하고 깨워주시는 것이 뭔지 아세요? "그만 좌절하고 그만 절망하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영광으로 기뻐하라."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잖아요. 우리는 뻔뻔해져야 된다. 저는 크리스천이 양심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거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얘기하는 그 양심이 아니라, 저는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세상의 양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양심... 잘 생각해보세요. 양심적이면 내가 죄를 지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안 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절망 속에 있어야 돼요. 죄책감 속에 살아야 돼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면, 거기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뭐냐고, 거기서 빨리 나와서, 그게 은혜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너의 양심은 자꾸 죄책감으로 붙잡고 늘어져서, "너 이런, 내가 왜 이랬지? 내가 왜 이랬지? 왜 이랬지?" 하면 그게 해결이 되나요, 여러분? 여러분, 40평생, 50평생, 60평생, 70평생, 80평생,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 죄가 해결이 되신 적이 있으세요? 죄송하지만 똑같은 죄예요. 성격도 똑같은 문제예요.

여러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뭐냐면요, 하나님께서는 그걸 갖고 우리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거기서 나와, 내가 너를 아들 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한 그 기쁨을 누리라"는 거예요. 만약에, 만약에 여러분이 그 기쁨을 본인이 누리잖아요, 내 연약함을 내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잖아요, 그러면 무슨 혜택이 있는지 아세요?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얼굴로 볼 수 있는 기쁨이 나와요.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의 문제가 해결돼요. 근데 저는 아직도 그걸로 씨름(struggle)하고 있어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우리는 평생 그 씨름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그 순간, 감사하게도 천국을 경험하게 돼요. 그때 저희 아내는 천사의 모습이에요. 제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죄 사함의 경험을 하면, 여러분이 천사처럼 보이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여러분이 천사가 아니라, 여러분이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똑같아요. 죄송하지만 저도 여러분이 볼 때 똑같아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근데 뭐가 틀려지는지 아세요? 내가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 내가 용납이 되는 거예요. 내 아내가 용납이 되는 거예요. 내 자식이 용납이 되는 거예요. 내 부모가 용납이 되는 거예요. 성도가 용납이 되는 거예요. 왜요? 오늘 시므온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요? 내가 가장 좋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기도했던 메시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영광의 빛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소원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래야 되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서 너무나 좋은 예수 그리스도를 값없이 받았잖아요. 그러면 이제 여한이 없는 인생이지 않을까요?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든, 내가 지금 누구와 함께 있든. 예, 그렇습니다. 어려워요.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안나처럼 금식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괜찮아요, 여러분. 그게 안 되는 우리를 아니까, 그 애통함으로 우리는 "그 일이 내 인생에 지금 일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금식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냥 오지 않습니다. 그냥 오는 날은 있어요, 여러분. 놀라운 일이 한 번에 오는 날이 있어요. 언제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 우리가 정말 육신이 끝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이든, 정말 예수님께서 다시 오는 그 재림의 날이든, 그날이 있어요, 여러분. 근데 중요한 건 뭐냐면 그날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갈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은 뭔지 아세요? 이 땅에서도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돼요? 그걸 달라고 떼를 쓰셔야죠, 여러분. 근데 우리는 안 부려요. 떼를 부리지 않잖아요. 왜요? 여기가 좋아서 그러세요? 이 땅에 가지신 게 많아서 그러세요? 이 땅에서 여러분 이미 행복해서 그러세요? 저는 이 땅에서 아무리 행복해도 안 행복해지던데요. 저는 제 자식이 아무리 잘해도 항상 뭔가를 더 원하던데요. 저만 그러나요? 제 아내가 정말 저를 잘해주는데도 저는 아내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고 있더라고요. 그것이 이 땅의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될 건 뭐냐면, "지금 하늘의 것들로 만족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들, 하나님께 떼를 좀 부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예기치 못한 기쁨을 경험했던 목자나, 정말 원하고 원하는 것들, 정말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들의 인생,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 답이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 시므온과 안나는 금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두 가지의 모습들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건 연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일들이 우리 가운데 좀 풍성히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예기치 못한 기쁨을 예배를 통해서 경험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금식하며 애통해하며 기도하는, "하나님, 지금 내가 이렇게 쓰러지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내가 보시기에, 제 양심상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데, 하나님 나를 찾아와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간절히 좀 기도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을 붙잡았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그러신다면 우리의 인생은 조금 조금씩 변화될 거예요. 우리가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나만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축복받아요. 우리의 가정이 축복받아요. 우리의 공동체가 축복받아요. 왜요?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속에 살고 계시니까요. 그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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