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23장 8-17절
8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9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11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3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6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러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탄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오늘은 13-18절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아마도 이 베들레헴의 사건은 다윗이 젊었을 때에 일어난 사건 같습니다. 사무엘하 5장 17-18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다윗과 블레셋은 참 기구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그는 블레셋 장수인 골리앗과 싸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의 보호 안에서 살았던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을 정복하려 기습적으로 공격을 했을 겁니다. 이런 와중에 브레셋의 기습공격에 맞기 위해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16마일 떨어진 곳인 아둘람굴 산성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재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어떠한 간절함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용사들은 그들의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왕에게 물을 바치려는 일념으로 블레셋 군대의 저지선을 뚫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가로 갑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세용사가 우물물을 가지고 오기 위해선 넘어가야 할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는 것 까지는 좋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세 용사들은 적군에게 노출된 것입니다. 이제 다시 그 적진을 뚫고 돌아와야 합니다. 불레셋 군대들은 더 적극적으로 세 용사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들의 칼날이 세용사의 몸에 상처를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불레셋 군대들은 세 용사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세 용사들은 가슴속에 우물물을 고이 품고 다윗 앞으로 나와서 그 물을 바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그들은 왕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을 바쳐 우물물을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충성심은 어떻게 생기나요? 그들은 다윗이 그들의 왕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릴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을 겁니다. 그들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많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이기 때문에 기다렸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깨어 예수그리스도의 발을 닦은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 알았기에 값비싼 향유를 아무런 주저 없이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세용사들은 그들의 왕인 다윗을 통해서 참 이스라엘 왕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에든지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섬기듯 왕을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6-17절에 이상한 일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 드립니다. 만약에 다윗이 이기적인 왕이라면 다윗을 그 물을 마셨을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다윗은 그 물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물은 단순한 베들레헴의 시원한 물이 아니라 세 용사의 피로 가지고 온 물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물을 받을 존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 물은 오직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만이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정확히 자신의 역할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직분은 단지 하늘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다윗은 물을 참 이스라엘 왕이신 여호와께 부어 드립니다. 이 모습은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즉 베들레헴 우물물이 세 용사의 피로서 하나님께 제사드려질 수 있는 제물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3장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시는 언약 안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온 베들레헴 우물물의 사건을 재 정리해야 합니다. 즉, 다윗의 언약 안에서 다윗이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사모한 이유가 무엇을 의미인지, 세 용사의 목숨을 건 영웅적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베들레헴 우물물이 세 용사의 피로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이 될 수 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봐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다윗의 언약과 오늘 이야기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윗의 언약은 그로 인해 구세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베들레헴 우물물 사건은 다윗의 언약을 이루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의 그림자로서 일어난 사건임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우물물을 사모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모하는 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계속해서 은혜의 언약을 맺으시며 인내하시는 그의 심정을 성경 저자는 다윗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이 주신 다윗의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다윗의 인생에 가장 소중했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세 용사의 충성심에서 나오는 영웅적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시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그림자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간들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죄의 통치 아래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죄의 통치 안에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 용사가 우물물을 얻으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로 오기 위해선 블레셋 군대를 뚫고 가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사탄에게 3번이나 유혹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는 율법을 완벽하게 순종하여 지키십니다. 세 용사가 산성 높은 곳에서 내려와 블레셋 군대의 저지선을 통과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에 도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순종하시는 모습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세 용사가 베들레헴 우물에 온 것은 우물물을 가지려 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그 우물물을 가지고 다윗에게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부터 인간의 죄를 대속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을 거룩한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멸시를 받으시면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십니다. 우리가 받을 진노를 그분께서 대신 받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일 후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그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통치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나가게 되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으니깐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심판 밖에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 다는 뜻은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우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의롭다고 불려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들의 첫 부활이 되신 겁니다. 세용사들이 베들레헴 우물물을 가지고 올라가 다윗 앞에 섰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모든 구원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이제 다윗이 왜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께 드린 이유가 확실해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의 언약의 성취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세 용사가 가지고 온 우물물의 참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라 세 용사의 희생의 피인 것입니다. 더 나가서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그 물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 자신도 그리스도의 피로서 의로워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이 주신 다윗의 언약의 핵심인 것입니다. 다윗 언약의 증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다윗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왕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 왕이 원하신 일을 한 용사도 압니다. 그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까지도 희생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용사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내어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이 모든 일을 함께 하신 성령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신 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여러분의 삶이 참 용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삶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redlong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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