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28-36절
28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들어야 하고, 어디의 권위를 따라야 하며,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가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셨을 때는 대부분 큰 관심을 받으셨을 때라든지, 아니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 다음에 보통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저희가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시거나 어떤 큰 사건, 사실 그전에 오병이어의 기적도 있었고, 또 되게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용모가 변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지금 누가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라고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 기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그런데 기도하실 때 누가 나타났느냐가 중요합니다. 30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저는 그다음 구절이 좀 이상했었습니다. 32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함께 졸다가 깨어납니다. 그런데 깨어나서 사람을 보니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했었죠? 모세와 엘리야라고 생각하니까 나중에 초막을 짓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자고 얘기를 해요. 옛날에는 사진이라는 개념이 없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모세와 엘리야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다가 '모세'라고 써 놓고 나타난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참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한번 해봤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뭐냐면, 지금 베드로는 물론 요한도 그리고 야고보도 이 사람이 엘리야와 모세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알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뭐냐면, 사실은 이 모세와 엘리야가 갖고 있는 성경적, 유대인의 구속사적인 중요성 때문입니다. 모세는 무엇을 대표하는 인물이죠?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율법을 전한 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모세를 섬겼다고, 율법을 준 자처럼 너희가 여겼다고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세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히브리서는 증거하고 있는 것을 저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는 모세가 너무너무 중요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선지자적인 개념이 있었단 말이에요. 선지자의 대표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마지막 때에 대한 선포, 여호와의 날에 대한 선포, 메시아에 대한 선포를 했습니다.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서도 전달되었지만, 그의 모습 속에서도 약간의 그림자적인 모습으로 드러났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나오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했던 인물이기도 하지만, 너무 중요한 건 뭐냐면 둘 다 예수를, 즉 메시아를 그림자적인 모습으로 보여줬던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모세를 통해서 오실 메시아를 알 수 있었고, 엘리야를 통해서 앞으로 올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변화산의 중요한 것은요, 예수님께서 변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게 예수님께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용모가 변화되기도 했죠. 옷이 희어졌다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광채가 나타나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리가 가끔 유명한 인물들을 보면 멀리서부터 환하게 보인다고들 하죠. 여러분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이 그렇고, 여러분이 존경하는 어떤 사람을 보면 딱 봤을 때 '아, 저 사람 다르다'고 느낍니다.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달라졌다는 건가요? 그건 아닐 거란 말이에요.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건 뭐냐면, 이 장소적인 개념 자체가 변했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죠? 산으로 가고 있어요. 항상 성경에서 산으로 간다고 얘기했을 때, 우리로 하여금 연상케 하는 산이 하나가 있어요. 시내산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시온산이 될 수 있어요. 시내산이나 시온산이나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곳에 뭐가 임한 거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임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용모가 변했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는 건, 이 장소적인 개념이 하나님의 나라 관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이 자리에 지정학적으로 그냥 침투해 버린 거예요. 그리고 침투해 버린 것의 증거물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해서 무엇을 했느냐입니다. 31절에 이렇게 얘기해요. 영광 중에 나타나서 뭘 얘기했다고요?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그러니까 세 명이 모여서 이야기한 내용의 중심에 뭐가 있다고요? 예수님의 죽음이 있는 거예요. 그게 왜 중요할까요? 이 말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8절 첫 번째 문장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변화산 사건의 아주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28절에 뭐라고 얘기하고 있죠?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럼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죠? 22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지금 누가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이 변화산 사건의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냐고 질문하시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물으신 뒤에,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난받고 죽임 당하고 부활하러 온 사람이다"라고 예수님께서 자기가 누구이심을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걸 이해했나요? 못 했나요? 못 했어요.
심지어 지금 특별히 제자들 중에서 세 명,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가장 중요한 수제자들을 끌고 올라가서 예수님의 변화한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의 반응은 뭐죠? 오늘 이 반응은 너무너무 신비로운 걸 경험한 반응이잖아요. 저는 제자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엄청난 신비적인 체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의 형체가 변한 것, 예수님에게서 광채가 나는 것,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것들, 거기다 심지어 모세와 엘리야까지 봤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들의 고백이 뭐예요? "여기가 좋사오니."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서 여기가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한 걸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 여기 있게 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열심히 다해서 초막 셋을 짓는데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고 우리가 여기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저는 제자들이 가장 뛰어난 종교성으로 반응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면을 지금 제자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뭐냐면, 종교적으로 신비스러운 체험을 했을 때 우리는 열정적일 수 있어요.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걸 더 잡고 싶어 해요. 여러분이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은혜받았다'고 생각하는 장면들, 그러한 사건들, 그런 일들이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그것들을 동경하죠. '내가 옛날에는 이랬었는데, 내가 이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그때 정말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는데, 나에게 이러한 기쁨이 있어서 내가 이러한 헌신을 했었다'고 우리는 그것들을 기억해요. 그걸 붙잡고 싶어 하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내 인생 속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노력해요. 지금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은 거예요. "초막을 짓기를 원합니다.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죠. 왜요? 중요한 건 뭐냐면 경험했어요. 뭘 경험한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거예요.
이게 좋으냐 나쁘냐, 저는 이거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누구나, 제자부터 시작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했을 때 "여기가 좋사오니" 해야 돼요. 이것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여기가 좋사옵니다"라고 고백해야겠죠. 그리고 여기에서 그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억할 만한 것들을 짓고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죠.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기쁘고 우리가 누렸고 우리가 했던 것들을 자꾸 기억하고, 자꾸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어서 우리가 좀 더 하나님 앞에 열심히 섬기며 나아가야 한다는 거,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맞아요. 그렇게 해야 돼요. 중요한 건 뭐냐면,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그래요.
33절 끝에 누가는 우리에게 아주 재밌는 말을 해요. 뭐라고 얘기하냐면,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했다라는 거예요. 일단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들을 누가는 우리에게 힌트로 제공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왜 그들이 온전히 알지 못했느냐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34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다는 의미는 그냥 자연 현상으로 구름이 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름이 갖고 있는 성경적 의미가 있어요. 그건 뭐냐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에요. 특히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 구름 타고 오는, 구름과 함께 오는 그 단어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구약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뭐냐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임한 걸 얘기하고 있단 말이에요. 산에서, 시내산 때도 그랬고, 항상 그 산에서 구름이 왔을 때, 그들을 덮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그들은 무서워하고 떨 수밖에 없었어요.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절을 보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 소리는 누구의 소리죠? 구름과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소리예요.
여기서만 누가가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에서 끊임없이 구름과 함께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얘기하면서 그 목소리가 들리는데, 어떻게 들리죠?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다시 한번 얘기하죠. 이런 사건이 있었죠.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얘기했어요. 여기서 다시 한번 "내 아들이라"고 얘기했고, "택함을 받은 자"라고 얘기를 해요. 이 말은 뭐냐면 예수님의 광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얘기해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변한 건 그냥 기적, 마술처럼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변화의 사건이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그곳에서 드러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거예요. 그 장소적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드러나고 있는 거예요. 중요한 건 뭐냐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뭐라고 얘기하죠?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의 말이 뭐죠? 지금 누가복음 9장에서는 충돌하고 있는 말들이 있어요. 하나의 말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미리 말씀해주는 말들이 있고, 또 하나의 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원하는 말들이 있어요. 제자들은 뭘 원하죠? "예수님, 사람들이 당신을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선지자라고 얘기합니다." 베드로는 뭐라고 하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생각 속에서, 이제 9장 후반부에 그 얘기가 드러나네요. 그들의 속마음이 드러나요. 그들은 뭘 원하는 거죠? '당신이 유대의 왕이 되셔야 합니다. 당신이 유대의 왕이 되어서 이 국민을, 이 백성들을 구하셔야 되고, 그 구하는 자리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사실은 제자들 마음속에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하죠. 너희는 누구의 말을 들으라고요?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요. 변화산에서 무슨 얘기를 했다고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죽으실 이야기를 하셨어요.
여러분,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 뭐죠?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모세가 와서 얘기하고 있었을 때의 결과물이 도대체 뭘까요? 2000년 전의 결과물,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똑같은 결과물이 들어오는데,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을 비추었을 때 그들은 복을 받을까요, 심판을 받을까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왔나요, 돌아오지 않았어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회개하라고 외쳤는데 그들이 돌아오나요, 안 돌아오나요? 돌아오지 않아요. 돌아오지 않는다면 뭐가 임하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요. 여기서 지금 모세와 엘리야는 그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한계를 얘기하는 거예요. '예수님, 내가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얘기를 해도, 내가 40년 동안 그들과 함께 광야를 지나가도 그들은 하나님을 좇지 않았습니다. 내가 화가 나서 반석을 두 번을 쳤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당신이 저들을 위하여 제물이 되어야 되십니다. 어린 양으로 제물이 되는 길로 가셔야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엘리야도 마찬가지죠. 아합왕과 이세벨의 게임에 넘어가 다 바알신을 섬기는 그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도 이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줄 이로 여기 오셨습니다.' 뭘 얘기했을까요? 그들은 아마 이렇게 얘기했을 거예요, 이건 저의 추측이에요. '예수님,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배신했던 것처럼, 그들이 예수님을 배신할 거예요.' 그 얘기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가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베푸실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은, 베드로는, 요한은, 야고보는 아직 그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초막 셋을 짓자고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뒤에 가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느냐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어요. 언제까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그들은 그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하실 때에야 그들은 온전히 알았어요. 그들은 이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았어요. 자신의 말을, 자기의 뜻대로 가는 삶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자기 주관대로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간다면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령이 임해서야 알게 된 거예요.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들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변화산에서 얘기하셨던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았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축복받은 자예요. 어떤 의미에서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보다 더 축복받았죠. 성령께서 우리에게 증거하셨잖아요. 이제는 우리가 해야 될 건 뭐냐면, 과연 우리는 누구의 말씀을 듣고 있느냐, 누구의 말을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상황을 파악하는 거 되게 중요해요. 여러분은 어떤 유튜브를 보세요? 어떠한 사고와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의 생각을 하세요? 정치적인 거, 신념에 관한 거, 관계에 관한 거, 여러분 다 틀려도 괜찮아요. 심지어 우리가 극좌가 있고 극우가 있든 그거는 다 괜찮아요. 중요한 건 뭐냐면, 마지막 날에 그걸 내려놓을 수 있냐라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 날에는 내가 극좌든 극우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일들에 순종할 수 있는가. 거기에 내가 내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좇을 수 있는가. 여러분, 이건 쉽지 않은 거 같아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실은 앞으로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이 의외로 되게 현실적인(practical) 것일 수가 있어요. 의외로 정치적인 것일 수 있어요. 의외로 되게 민감한 관계에 대한 이슈일 수 있어요. 그리고 사실은 이런 일들은 이전에도 있었어요. 만약에 여러분, 그냥 만약이라고 얘기하지만 이런 일들이 현실화되고 있어요. 만약에 우리 가운데 불법 체류자가 있다고 치고,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그런 분들을 추방하기 위해 교회를 온다면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보호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내어줄 것입니까? 이거는 정치적으로 우리가 분명히 해석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목사로서 간청하고 싶은 건, 세상에서 얘기하고 있는 정치적인 것보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말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어요.
좌다, 우가 아니라. 진보다, 보수다의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미국 시민이냐 아니냐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에게 먼저 질문되어지는 건 '하나님이 나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하나님이 나에게 먼저 요구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시는 것을 판단하셨으면 좋겠어요.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어도 그래요.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순간의 선택에 있어서, 관계적인 부분, 내 가정에서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성도들의 관계라든지 여러 가지 문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경험, 그리고 내가 겪었던 일들, 내 철학, 내 가치관을 위해서 결정해요. 근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건 뭐냐면, 그걸 내려놓고 하나님이 얘기하시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그 일들을 우리가 하고 있는지를 저와 여러분이 고민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우리는 그 일조차 하고 있지 않은 거 같아요.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시대.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신앙생활도 수도 없이 하고 있지만, 아주 간단한 첫 번째,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려고 하고 있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느냐 안 하느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는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 들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은 건 뭐냐면, 큰 게 아니라요, 여러분 모든 일을 선택하실 때, 오늘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실 때 하나님께서 얘기하셨어요. "그의 말을 들으라."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려고 성령께 의지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나에게 큰 결정하는 그 일 모두에 그러한 노력들을 시도하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만나게 되죠? 누구와 함께 계시죠? 우리 가운데 초막을 치신, 우리 가운데 성막을 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내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실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전으로 변하고, 우리 하산 학교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전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함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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