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9장 44-48절 누구를 영접할 것인가

reformedmind 2025. 10. 12.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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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44-48절
44그들이 다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46제자 중에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 특히 내가 썩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을 쉽지 않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린아이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어린아이는 매우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이지만, 100년 전이나 예수님 시대의 아이는 그렇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여러분이 한 가지 고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제자들은 무능했고, 쓸데없는 변론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처럼 중요하지 않은 일로 논쟁하지 말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에 힘쓰자”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이런 쉬운 결론에 고민 없이 도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제자들과 똑같은 논쟁을 일상에서 자주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누가 더 큰가?”, “엄마가 큰가, 아빠가 큰가?”와 같은 다툼이 벌어집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누가 더 권위가 있는지를 두고 신혼부터 지금까지 계속 싸워왔지 않습니까? 이런 본성을 고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이 왜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당시의 아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무시해도 될 만큼 힘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는 9장에서 의도적으로 두 장소, 즉 산 위와 산 아래를 대조하며 그 차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산 위에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주님,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의 모습은 혼란 그 자체였고, 세상의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권위와 권능을 부여받았던 제자들은 병을 고치지도, 기적을 행하지도, 귀신을 쫓아내지도 못했고, 큰 무리는 불평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후에, 바로 이 상황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을 벌이는 제자들에게 아이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란 힘없는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10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노동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아이와 같이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지금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이는 사랑받을 존재이기에, 우리는 본문을 그렇게 피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내 집에 온다면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야’라고 여기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며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누가 크냐’라는 주제로 논쟁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 그들이 이런 논쟁을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기에, 그들 사이에 질투가 일어났을 수 있습니다. 결국 논쟁의 핵심은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가’,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왕이 되셨을 때 누가 그분의 좌우편에 설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이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권력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세우려는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면, 끊임없이 ‘누가 크냐’는 논쟁을 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도, 가정에도, 심지어 목회자들의 모임에도 이러한 권력 투쟁은 늘 존재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세운 업적, 헌신, 지식을 내세워 내가 더 크다는 것을 확인받고, 그 권력을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제자들은 바로 그런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논쟁을 한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왕국과 왕의 개념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44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을 귀에 담아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45절에서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하도록 그 뜻이 숨겨져 있었으며, 심지어 그 말씀에 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숨겨졌던 뜻이 드러나는 때는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입니다. 성령이 임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그 뜻을 깨닫고 예수님의 생각과 동일한 생각을 품게 됩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제자들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가 크냐’고 다투던 그들은, 스스로 작아지는 삶을 살게 되었고, 성경은 바로 그렇게 작아진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되었다고 사도행전에서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나중에 행하게 될 일의 원칙을 알려주십니다. 48절에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 말씀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내 이름으로’라는 구절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어린아이를 영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귀에 담아두라”고 하셨던 그분의 정체성, 즉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당하시는’ 십자가 사건과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당장 왕이 되시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왕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힘없는 자를 영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누가복음 6장의 평지 설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 즉 어린아이와 같이 힘없는 자들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그 소외된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자신들이 ‘누가 크냐’고 논쟁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임을 깨닫고, 그 복을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서 그 풍성함을 누리며, 동시에 앞으로 완성될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며, 내가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힘없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는 겸손의 길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낮아짐의 극치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 역시 쉽지 않습니다. 하기 싫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가 그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도전하시고 이끄십니다.

물론 우리는 실패하고 좌절하며 하나님께 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성령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선을 행했음에도 박해와 애통함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령께서는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켜 그 길을 걷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부르셨기에, 여러분은 이미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다시 부르실 때 용기를 내어 또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그 길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곳에 참된 축복과 기쁨, 그리고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 선배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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