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37-43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누가복음 9장 37-43절
37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38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 아들이니이다 39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40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4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 당연히 ‘믿음 없는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이 말씀이 제자들만을 책망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는 했지만, 그들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닌 듯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언뜻 들으면 예수님께서 책망하거나 질책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선포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걸까요? 바로 산 위에서 있었던 일, 즉 변화산 사건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셨던 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산에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산 아래의 일입니다. 성경은 산 위의 일과 산 아래의 일을 대조하고 싶어 합니다. 산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산 아래에는 부족함과 무능함, 그리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대한 질책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 9장의 시작을 기억하십니까? 9장 1절에서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전도 여행을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는 권위와 귀신을 내쫓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권위와 능력을 받았던 제자들이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37절은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라고 기록합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7장과 내용이 유사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많은 사람이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기록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가 표적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유익과 문제 해결을 위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께 나아온 대표적인 사례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아들을 고쳐주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여기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먼저 제자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었다면 분명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무능함이 문제의 일부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본문을 출애굽기 32장과 연결해서 살펴보고 싶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의 상황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와 마주하신 모습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시작은 권위 있는 지도자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요구했지만,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역시 이스라엘을 이끌던 모세의 부재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중보자 역할을 하던 모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마치 하나님도 사라진 것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론에게 가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문제는 아론이 백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이것이 너희를 구원한 신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아론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그들은 과거 전도 여행에서 권능을 행했을 때 사람들이 자신을 따랐던 경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 계신 동안 찾아온 무리에게 어떻게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려 온 힘을 다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선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나쁜 무능함’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든 모습이 바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인 것입니다.
다시 출애굽기 32장으로 돌아가면, 시내산 아래에서 우상 숭배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목이 뻣뻣한 백성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들을 위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10절에서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을 모두 진멸하고, 아브라함처럼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진노 앞에서 모세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풀리지 않자, 모세는 레위 자손을 불러 불순종한 이들 삼천 명을 죽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기에, 그 심판의 일부를 직접 집행하여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자신을 걸고 백성을 위해 드리는 이 얼마나 위대한 중보 기도입니까. 아마도 모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 일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모세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장차 행하실 일과 연결하여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무능한 제자들과 자기 유익을 위해 모인 무리를 마주하십니다. 그들은 시내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을 향해 기적을 베푸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를 멈춰달라고 간청하는 수준을 넘어,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친히 그들의 죄를 짊어지는 제물이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진노와 심판을 대신 받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에 대해 마태복음 17장은 힌트를 줍니다. 사건이 끝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20절에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제자들의 실패 원인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인데, 큰 믿음이 아니라 겨자씨 한 알만 한 아주 작은 믿음조차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기는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산은 어떤 산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산"이라고 지칭하셨는데, 이는 바로 변화산, 즉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그 산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산은 두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시온산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산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산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산으로 옮겨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을 주셨기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무능한 자들이 아니라 패역한 세대를 향해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패역한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권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여줄 권능은 바로 이 ‘산’을 옮기는 권능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증거하여,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가는 곳이 시온산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모인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한 알의 기적입니다. 이를 통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대신 은혜가 임하는 기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목이 뻣뻣하고 믿음이 없으며 패역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만든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산을 옮기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세상을 찾아가 그곳을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거룩한 산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순종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