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23-27절 제자가 된다는 것
누가복음 9장 23-27절
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무 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영리 전도도 하지만, 그냥 사영리 내용을 따라 하면 ‘당신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그 절차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를 우리가 온전히 알고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신 집사님이 기도하셨던 내용처럼,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를 부르는 사람들이 과연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진리를 수호하고 있는가, 하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에 저희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유튜브를 봤어요. 부산에 가서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가 택시 운전사분과 얘기하다가 현재의 여러 가지 시국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마지막에 택시 기사님이 이런 얘기를 해요. 교회를 가고 싶어졌대요. 그래서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지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반대하는 활동을 부산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하나 봐요. 그러니까 자신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교회 한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제 뒤통수를 무언가가 탁 치는 듯했습니다. 이게 뭘까. 우리가 생각했던 어떤 방식의 ‘진리’라는 것들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전도할 때 어떻게 얘기하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함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그 사람들이 교회에 오게 되고, 그리고 예수를 믿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그러한 논리를 지금까지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 저 사람이 만약 지금 시국의 어떤 일들에 관심을 가져서,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교회라고 해서 온다면, 정말 예수를 알 수 있을까? 예수가 그 사람의 인생을 흔들 수 있을까?’라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를 한번 저와 여러분이 지금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교회를 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를 믿는다’라는 표현을 써요. 그런데 교회를 믿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교회를 간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제자도, 그 제자도는 그냥 그리스도인 가운데 아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요구됨이 무엇인지 우리가 살펴보고, 다시 한번 우리 인생을 돌아봐서 내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따라가야 되고, 무엇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지를 깨닫는 이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또’라고 하니까 그전에 하셨던 말들을 저희가 기억해야 돼요.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봤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어요.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다시 왔다고 얘기하고, 엘리야라고 하고,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었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당신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여기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이라고 우리는 살펴봤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들이 기대하는 왕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들을 다시 한번 설명하는 내용이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유대의 왕으로 소원했었다는 겁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적 왕을 기대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와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나는 세상 죄를 짊어질 어린 양으로서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아야 되고, 버림받아야 되고, 죽임을 당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전제로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얘기하시는 게 뭐냐면, “나를 따라오려거든”, 다른 말로 얘기하면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요구 사항들이 있는 거예요. 전제 조건이 있는 거예요. 첫 번째, **자기를 부인하고,** 두 번째,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의 의미**
여러분,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내 이름을 부인하는 걸까요? 아니면 내 태생을 부인하는 걸까요? 저는 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서 정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자도(弟子道)잖아요. 제자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 안에서 정의되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제자란 말이에요. 저희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예수의 삶이 나의 삶이 되고,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참하는 삶이라는 것들을 배워왔어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의 근본적인 원형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는 것,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예수님처럼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뭘 하셨죠? 이 땅에 오셔서 단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온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그리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자기 부인을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가 좀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인생의 목적이 도대체 뭐세요? 여러분 인생의 목표, 내가 인생을 살아 마감했을 때 ‘내가 이것을 이루었다’고 할 만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세요? 어떤 분은 “별다른 거 없죠, 그냥 사니까 사는 거죠”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 같아요. 그럼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뭐냐면, 여러분은 무엇에 부르심을 받으셨나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약간의 혼동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내가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들로 강요받았어요. 좋은 남편이 되든지, 좋은 아버지가 되든지, 아니면 내가 사업에 성공하든지, 내가 출세하든지, 이런 ‘성공’,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것들을 요구받았어요. 그러니까 그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고, 심지어 어떤 일을 해서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을 이루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했다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사실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리고 25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내용들을 보면, 자기 부인의 한 면은 뭔가를 ‘빼앗긴다’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고민해봐야 할 것이 뭐냐, 그럼 여러분 뭘 빼앗기는 거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제자가 되었을 때 내가 뭔가를 빼앗기는 거예요. 뭔가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고 잃어버린 것 있으세요? 예수 믿고 뭔가를 빼앗긴 적이 있으세요?
이게 어떻게 보면 지금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과 상반되는 것처럼 느껴져요. 왜냐하면 기복 신앙에 익숙한 우리들은 뭔가 열심히 하면 뭔가를 얻는다고 생각하죠. 기독교를 우리가 이해했을 때, 자꾸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 주시고 뭔가를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늘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내 삶의 보답을 해주시고, 내가 10을 하면 하나님께서 90을 더해서 100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늘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못 이루었을 때는 ‘내가 뭔가 부족하구나,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 교회든 미국 교회든 기형적인 믿음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어요. 어떤 믿음이죠? ‘나’ 중심적인 믿음이에요. 내 필요성을 해결해주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결국 그 신앙생활의 중심에 누가 있는 거예요? 내가 있는 거예요. 내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왔다가 갔다가, 하나님을 쓰기도 하고 하나님을 버리기도 하는 것들이 너무 익숙한 거예요. 심지어는 우리의 사상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들이 지금 이 세상에서 말도 안 되게 일어나고 있고, 그걸 수많은 사람들이 쫓아가고 있는 것들을 볼 때, ‘정말 이게 말세는 말세구나, 정말 요한계시록에서 일어나는 이 엄청난 일들이 우리 눈앞에 보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적어도 본문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면, 너희는 뭘 잃어버리고 있느냐는 거예요. 너희는 뭘 빼앗기고 있느냐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잃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그랬어요. 다니엘도 그랬었죠, 그렇죠?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신앙의 생활을 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가기 위하여 자기의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에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아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축복이라고 하세요. 내가 이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하늘의 것들로 복을 주시는 것들을 저희는 목격할 수 있어요.
그것의 가장 큰 예가 누구죠? 예수님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것들을 내어주셨어요. 어디까지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잃어버리셨어요. 자기의 명예를 잃어버리셨어요.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어요. 십자가에서 저주의 욕설을 들으셨어요. 그 모든 것들을 그냥 잃어버리셨어요. 왜요? 아버지의 뜻이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순종함으로 걸어가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그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셨던 그 말씀이 우리에게 왔는데,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과연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습니까? 무엇을 내어놓고 있습니까?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다 잡고 싶을 때가 많아요. 세상의 것도 잡고, 세상의 영광도, 세상의 명예도 잡고, 그리고 하나님의 것도 잡고, 심지어 하나님의 것을 이용해서 세상의 것들을 취하려고 하는 우리 욕심들, 우리 욕망들, 우리 죄성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해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얘기해요. 자기를 부인한다는 건 뭐냐면, 내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거예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들을 인정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속해 있다는 것들을 확인하는 거예요.
이게 현대 사회의 용어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현대 인문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죠. 왜요? 우리는 늘 ‘내가 누구인가’를 찾기를 추구해요. 결국은 ‘나’ 중심적이에요. 모든 인문학, 모든 심리학도 ‘나’ 중심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요. 근데 성경에서는 ‘나’ 중심적이 아니라, 너의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라고 요구해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너의 인생 속에서 추구하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너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중심에 두라고 얘기를 해요.
이 이야기는 다음의 문장과 연결이 돼요. 26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거든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뭐예요? 예수님께서 얘기하시는 거예요. 내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는데,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그렇죠?
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드러날 때가 있어요. 빌립보서 1장 20절부터 2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이렇게 고백해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이 말은 뭐예요? 내가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를 알기 전에는 내가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고 명예를 갖고 모든 것들을 다 소유하고 있었는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모든 것들이 다 없어져 버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이렇게 얘기해요.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내가 예수 믿기 전과 아무런 차이 없이,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해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모습이에요. 뭐라고 얘기하고 있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6절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얘기해요. 왜요?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결국 나는 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고, 나를 공동체 안에서…
참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어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정말 바보처럼 살아가야 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왜요? 정말 뭐가 그리스도인인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특별히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남은 자처럼 소외되고 핍박받는 존재가 아니에요. 더 이상, 그렇죠? 한국 사회에서도 그렇고, 미국 사회에서도 그렇고, 기독교는 이미 기득권자예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들의 부류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이 복음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향하여 얘기하고 있냐면 잃어버린 자들을 향하여, 소외된 자들을 향하여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내려놓으라고 얘기해요. 의도적으로 낮아진 곳으로 가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
저희가 옛날에 함께 읽었던 분 가운데 헨리 나우웬이라는 신부님이 쓴 책을 읽었었어요. 그분의 책 가운데 이렇게 십자가 얘기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읽어드릴게요. 두 번째로 우리에게 얘기된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너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얘기하고 있거든요.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십자가의 길, 즉 하나님의 하향성(下向性)은…’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향한 하향성’이라는 단어를 써요. 저는 이 단어가 참 마음에 들어요. 우리는 늘 상향성(上向性)만 추구했었어요. 이 땅에서 내가 좀 더 높은 곳으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셔서 늘 높은 곳으로 가라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의 길이라면 상향성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하향성이거든요. 낮아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요. ‘십자가의 길, 즉 하나님의 하향성은 우리가 예수를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의 길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우리가 뭔가를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의 부르심에 응하는 순간, 우리는 이게 존재론적인 길이 돼버린다는 거예요. 누구를 통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통하여.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영, 결국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순간, 십자가의 길은 옵션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옵션으로 생각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우리는 항상 상향을 향해 있으니까요. 내가 예수님께 축복받아서 이 세상에서 좀 유명해지고, 능력이 있고 권위 있는 자가 되는 것, 내 힘으로 뭔가를 좌지우지하고 세상이 보기에 뛰어난 일을 하는 것, 늘 그쪽으로만 생각해요. 그것이 여러분의 가정이든, 여러분의 개인이든, 교회이든, 여러분의 직장이든, 늘 그런 쪽으로 갈 때가 많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는 건 뭐냐면, 예수를 믿는다는 건 십자가의 길이 옵션이 아니라 여러분의 존재론적인 길이 돼버리는 거예요. 내가 그냥 의도적으로 ‘예수님 가셨으니까 나도 가야지’ 하고 열심히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걷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들으니까 되게 짜증 나지 않아요? 그럼 내가 지금 힘들게 살라는 얘기인가? 그렇죠? 아니, 인생 기껏해야 몇십 년인데 지금 편안하게, 즐겁게, 기쁘게 살아야 되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힘들게 살라고 그러고, 자꾸 하향성으로 가라고 하고, 그러면 답답하잖아요. 몇 년밖에 안 살 건데, 그렇죠? 별로 안 남았는데.
####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되게 중요한 단어, 구절이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본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27절의 이야기를 이해하셔야 돼요. 27절의 이야기가 아까 읽었던 그 ‘그리스도의 영’과 연관되어 있어요. 27절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강조하고 싶어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겠죠. 그리고 뭐라고 얘기했죠?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셨어요. 베드로의 고백이 뭐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이요. 어쩌면 베드로의 이해는 완전한 이해가 아니었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설명하셨어요. “나는 왕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죽임을 받으러 왔다. 내가 고난을 받을 거다. 내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라고 얘기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게, “너희도 내가 가는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된다”라는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그런데 너희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다.” 누가 봤었죠? 베드로가 봤잖아요. 열두 사도가 봤잖아요. 언제 봤죠? 아까 제가 힌트로 뭐라고 했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임하실 때.
성령이 증거하는 오순절의 사건을 통해서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자마자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변했어요. 더 이상 상향성이 아니라 오히려 하향성,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데, 거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죠?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일어나는 거예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무엇 때문이에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깨달았는데, 이제 뭘 본 거죠?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 땅에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향성으로 가야 하느냐, 왜 우리가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걸어야 하느냐. 첫 번째는 무엇 때문이었다고요? 우리의 존재가 바뀌었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것입니다. 결국 선택의 이슈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거죠.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뭘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보셨어요? 지금 이건 2000년 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잖아요.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 다시 오시면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 자들이에요. 성령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거기에 응답하는 자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을 열망하는 거예요. 영생이 그냥 단어적인 개념이 아니라,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생을 소유했다면, 지금 10년, 20년의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하향성으로 갈 수 있는 이유. 만약 이 세상이 전부라면 여러분, 하향성으로 가는 건 밑지는 장사죠. 안 그러세요? 여러분, 여기가 다라면, 이 세상이 여기서 끝난다고 하면 여러분 이러고 계시면 안 돼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걸로 최대한 많이 누리시고, 아니면 더 많은 것들을 얻으시고, 이 땅에서 행복한 것들을 추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사셔야 돼요. 왜요? 이 세상이 전부니까. 근데 성령이 증거하시는 건 뭐냐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성령을 통하여 보여주신다는 거예요. 천국을 맛보게 하신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뭐예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천국을 볼 수 있다는 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그 풍성함을 더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기쁨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 중심에 천국을 소유하고,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모실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셔서 내 것들을 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것이 하향성으로 가는 길이라도 말입니다. 왜요? 그곳에 기쁨이 있으니까. 그곳에 참 감사가 있으니까요.
문제는 뭐냐면, 우리는 그것들을 경험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점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건 뭐냐면 말씀으로, 성령을 통하여 천국을 이 땅에서 맛보는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넘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일 제 십자가를 진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 십자가는 이 당시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죠?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받아들이세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우리의 대속의 의미도 있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영광, 심지어 귀신도 쫓을 때 십자가를 내미니까 십자가 자체가 파워 있고 능력 있고 은혜와 축복의 상징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들고 있어요.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십자가는 어떤 의미죠? 수치의 의미, 저주의 의미.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되게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어요. 근데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건 뭐죠? 너희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거예요.
저는 이게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되게 도전적인 의미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의 고난을, 십자가의 멸시를, 십자가의 수치를 감내하는 거죠. 세상은 십자가를 봤을 때 그렇게 볼 수밖에 없어요. 근데 어느 순간,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순간, 그 십자가가 변화되는 걸 느끼는 거죠. 다른 사람에게는 수치인데, 나에게는 뭐가 되는 거예요? 권능이고 능력이 돼버리는 거예요. 나에게는 영광이 돼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믿음이에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 내 삶의 목적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뭐예요? 내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아가겠다는 고백 아닙니까? 세상의 법을 쫓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눈을 쫓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그러면서 그의 고백이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렇기 때문에 뭐라고 표현해요? “죽는 것도 나에게는 유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위대한 고백인 것 같아요.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보면 ‘과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우리는 당연히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바라봐야 되는 건,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의 힘으로 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성령의 힘을 의지했었어요. 사도 바울은 성령께 구했어요. 도움을 청했어요. 결국 우리가 해야 될 건 뭐냐면, 우리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들은 지금 이 순간 판단되고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 싸워야 할 일이라는 것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평생, 언제까지요? 하나님 나라 가기 전까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평생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의 싸움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요. 저만 그러나요? 저는 인정받고 싶어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고, 괜찮은 목사가 되고 싶고, 괜찮은 아빠가 되고 싶고, 누군가에게 항상 늘 인정받고 싶어요. 그게 우리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얘기하는 건 뭐냐면, 그걸 내려놓고, 그걸 부인하고, 누구에게 향하라고요? 그리스도에게 향하라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주인 되셔서,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수치를 당하고 내가 인정 못 받아도, 내가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우리는 늘 노력하라고 오늘 본문이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 것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계십니까? 현대 기독교를 보면 자신의 파워가 무너지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요. 기득권자로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들이 무너지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처럼 오해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소외되고 힘든 자를 짓밟으면서까지도 자기의 것들을 붙잡으려고 하고, 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까지 본인들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어요.
저는 거기서부터 우리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옳고 그름을 주장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길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하여 우리의 것들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긍휼하심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어려워요. 버거워요. 그리고 하기 싫어요. 어떨 때는 짜증이 나요. ‘내가 굳이 여기까지 할 이유가 있나? 내가 저렇게 무지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했는데, 과연 그 사람들이 알까?’ 계산하고 판단하면 답이 안 나오는 일들이죠.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 답이 안 나오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다는 것. 이제 도전하면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지금 당장 그 일을 하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이 일은 우리가 죽기까지 해야 하는 일들이라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우리가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순간 양심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의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우리가 했으면 좋겠어요. 거기까지만이라도. 조그만 몸부림이라도.
왜요? 그것만이라도 소중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그것만이라도 누군가 해줘야 될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것만이라도 좀 해야 숨통이 트이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아니요, 슬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답답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우리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 시대에 살게 하신 이도 그리스도이신 것 같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됐든, 조금이라도 순종하며 그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