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9장 18-22절 나를 누구라 하느냐

reformedmind 2025. 10. 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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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18-22절
18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저는 지난 2주 동안 캄보디아 단기선교를 이끌고 왔는데요, 그곳에 가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여러 가지 사역을 했는데 의료 사역도 있고, 미용 사역도 있고, VBS 사역도 있었고, 그중에 하나가 축호(逐戶) 전도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마다 가서 복음을 제시하는 일을 했습니다. 복음을 제시하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아, 참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통계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2%도 안 되거든요. 그리고 저희가 방문한 세 마을은 매년, 1년에 적어도 두 번은 가서 전도하는 곳입니다. 2월에 한 팀이 가고, 여름에 또 다른 팀이 가서 복음을 전하거든요. 복음을 전하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면, 그들이 예수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던 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에 대해서 알아요. 특별히 저희 센터 주위에 있는 마을과 거기에 있는 교회들은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증거하면 너무나 재미있는 건 뭐냐면요, 거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희가 축호 전도를 가면, 딱 도착했을 때 의자를 다 꺼내 와서 앉으라고 얘기를 해요. 그리고 미국에서 간 저희들은 열심히 준비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열정으로 정말 열심히 얘기를 하거든요. 열심히 복음을 전하거든요. 그러면 그걸 다 들어요. ‘어떻게 보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그 사람들은 열심히 들어요. 그리고 맨 마지막에 하는 얘기가 뭔지 아세요?

“예수, 좋은 분이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나는 절에 가요. 예수라는 분 잘 아는데, 그런데 예수만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어떤 분은 아버님이 교회를 다니셨대요. 그런데 그 따님이 나이가 들어서 하는 얘기가 뭐냐면, 예수님 믿는 게 한 50% 정도고, 50%는 다른 것도 믿는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와, 참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미국에서 성장한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복음을 전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어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옛날에는 그랬대요. 예수 믿으면 불효하는 사람들이라고요. 왜냐하면 부모님 제사를 안 드리고, 돌아가신 다음에 돌보지 않는다고 그렇게 인식이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센터가 그 마을에 들어간 지 꽤 되고 하니까 인식이 바뀌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참 선한 사람들이야’, ‘예수는 좋은 사람이야, 좋은 선생님이야’, ‘예수님도 하나님인 것 같은데, 많은 신들 가운데 내가 믿고 있는 신들 중 하나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캄보디아의 현실인 것 같아요.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이 천국 잔치임을 저희가 살펴봤어요.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히 양적인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이 상징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존재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오병이어 사건 다음에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얘기하죠.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바로 헤롯 대왕이 생각했던 거예요. 헤롯 대왕은 예수가, 죽었던 세례 요한이 살아난 사람처럼 생각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특별한 사람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다, 라는 것들은 충분히 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왜요?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니까요.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정말 파워풀하게 선포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캄보디아 사람들도 예수님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왜요? 예수라는 분을 전하기 위해서 멀리서 사람들이 매년 찾아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니까요. 그리고 학교를 짓고, 거기에 병원을 짓고, 커뮤니티 센터를 짓고 있으니까 뭔가 다르게 보는 거죠. ‘예수 믿으면 뭔가 다르구나’라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해요.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하고는 조금 다르죠.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제사장입니다’라는 것들을 함축적으로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해요. 그 의미와 이 의미가 같은 것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지금 베드로는 자기의 힘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성령의 힘으로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이루신 그 모든 것들을 보고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그냥 결과론적인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어요. 왜 그러냐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22절에서 하시는 이야기를 듣자,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지키기 위해 대신 죽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거든요.

자, 그러면 이 당시에 메시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 당시에, 여기에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어떤 식으로 사람들은 기대하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그들이 기대했던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는 왕을 기대한 겁니다. 어떤 왕이죠? 다윗 왕과 같은 모습을 기대했었어요. 로마의 압제로부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왕으로 기다렸다는 거죠. 현대 언어로 얘기하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로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교회를 다닐까요?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얘기할까요? 어떻게 보면 현대의 많은 교회 다니는 신자분들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교회 앞에 나오는 케이스가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기복 신앙이 교회 안에 많고, 어떻게 보면 자기의 의지를 교회라는 세팅으로 관철시켜 무엇인가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시대에 저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세요. 그것이 뭐냐면, 22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이르시되 인자가...”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를 ‘인자’라고 표현하세요. 지금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자’라는 표현으로 얘기하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인자로 표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인자가 뭘 해야 되냐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시고...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에요. 이 당시에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아니에요. 이 당시의 사람들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를 원했어요.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 주시기를 원했어요. 자신들의 질병을 고쳐주기를 원했어요. 자신들의 배고픔 문제를 해결해주는 자를 원했어요. 그래서 무리들은 예수님을 쫓았어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쫓아온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따르는 이유는 너희가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배고픔을 해결하려 함이라”고 얘기하고 계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이 질문을 해야 돼요. ‘나는 과연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왜 교회를 다니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사실 저희가 해야 돼요. 안 그렇다면 캄보디아에서 복음을 듣는 캄보디아인, 그냥 평범한 캄보디아인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그것을 교묘하게 속이고 있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되게 솔직하더라고요. 너무나 솔직해요. 그래서 저희가 황당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요. 이렇게 열심히 우리가 왔는데, 그분들은 너무나 솔직하게 “예수님 좋죠. 근데 나는 예수님도 좋고, 나는 불교도 좋아요. 예수 믿는 사람 좋다는 얘기 들었지만, 난 그래도 불교와 이 문화들을 버릴 수가 없어요”라고 해요.

어떤 분이 그렇게 얘기해요. “나 교회 다녔었어요.” 우리는 안타깝잖아요. “어, 교회 다니셨다고요? 어, 그럼 교회에 뭔가 잘못된 게 있었나요? 어, 뭐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나요?” 그런 질문들을 해요. 근데 그 사람들은 “나 교회 다녔어요. 그런데 교회 다니는 건 그냥 여러분들이 뭐 해준다고 해서 그래서 간 거고, 사실은 나는 불교 신자예요. 내가 여기 있는 내 이것들을 다 버릴 수는 없어요. 근데 당신들 참 고마워요”라는 얘기를 해요.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당황스럽죠.

근데 사실은 현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분들은 똑같이 생각하면서 그냥 가면을 쓰면서, 내가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는 것처럼 생활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내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이 필요하지, 그냥 예수님을 어떠한 신처럼, 내 문제 해결해 줄 마술 램프의 지니처럼 생각하는 거죠. 그때만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모습들이 사실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나는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왔기는 왔는데, 너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왔기는 왔는데,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다”는 거예요. “너희는 내가 왕이 되어서 오른쪽에 누가, 왼쪽에 누가 앉는가를 싸우고 있는데, 나는 이 세상에 죽으러 왔다”는 거예요.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세례 요한이 얘기하는 것처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어린 양으로 오셨다는 거예요. 어떤 어린 양이요? 도살될 어린 양, 십자가에 달려 죽는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왔다는 거예요.

근데 그 어린 양이 많은 고난을 받으신대요.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는데요. 그래서 결국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예수님을 여러분은 믿고 계십니까? 무슨 말이냐면요,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관심이 많으세요. 우리의 삶에 관심이 많으세요. 근데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관심을 갖기 원하는 것에는 일단 관심이 적으세요.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냐면, 여러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옮기는 데에 관심이 있으세요. 그 일을 하러 오신 거예요. 여러분의 근본적인 문제, 여러분이 해결할 수 없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그러기 위해 어떤 길을 걸으신 거예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거예요. 버림받는 길을 걸으신 거예요. 저주의 길을 걸으신 거예요. 누구의 길이죠? 우리의 길이에요.

많은 분들이, 우리가 되게 놓치고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우리가 특별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이런 부분들을 놓쳐버려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놓쳐버릴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것이 뭐냐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자세히 해야 하냐면, 다음 주에 저희가 살펴볼 내용 때문에 그래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다음 주에 살펴보겠는데,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얘기를 해요. 이것이 결국은, 오늘 저희가 읽지 않았지만 지금 이 본문 안에서, 오늘 본문과 다음 주 본문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예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 됨을 요구할 때 우리의 파운데이션, 즉 전제 조건이 뭐냐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러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온전히 모르면 우리의 제자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따라가고, 심지어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버린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온전히 모른다면 그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중요한 내용인, 인자가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히 알아야 된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이 다라면, 저는 그냥 캄보디아인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침에 저희 센터의 길을 걷는데요, 낮에는 섭씨 32도(화씨 90도)가 넘고 습해요. 낮에 이렇게 축호 전도를 하며 걷잖아요? 한 30분 걸으면 너무너무 피곤해서 힘들어 죽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침에는 섭씨 25도(화씨 78도)였어요. 아침에 걷는데 그렇게 시원하더라고요. 제가 태어나서 경험한 가장 시원했던 78도였는데, 그 시원함 속에 풍경을 보는데 너무 평온해요. 그냥 이 들판이 너무 평온한 거 있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니, 이렇게 평온한 곳에 예수가 필요할까?’ 우리는 필요하다고 갔는데, 저 사람들은 과연 예수라는 존재를 그전에 알지도 못했고, 예수 없이도 정말 그냥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되게 소소해요.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다음 생에 좀 더 나은 데로 태어난다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들 나름대로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과연 그들에게 예수가 필요할까?’ 하고 생각했죠.

이것을 우리에게 가져와 보면, 과연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예수가 왜 필요하죠? 이게 되게 아이러니한 것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는 거기에 대해서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어요. 예수를 아니까 이런 고민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은혜인 거죠, 어떻게 보면.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왜 필요한가’라는 고민을 시작했을 때 우리가 해야 될 건 뭐냐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가 필요한데, 그럼 필요했는데 어떻게 찾고 있나요? 세상에서 찾는 하나님처럼 찾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온전히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고 찾는가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죠.

세상은 신들을 이용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쟁취하려고 하는 욕망들이 늘 있었어요. 신들을 두려운 존재로, 아니면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는 존재로 사용해서 자기들의 필요와 안전을 해결해주는 존재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완전히 깨부수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내가 너희의 그리스도인데, 왕인데, 어떻게 이 땅에 오신 거죠?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얘기해요. 그리고 많은 고난을 받으신다고 얘기해요. 여기서 많은 고난은 어떤 고난일까요? 한번 생각해보셨어요? 여기서의 많은 고난은 우리가 받을 고난이에요. 이 땅에서 우리가 받는 고난들이에요. 여러분이 태어나서부터, 왜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어떤 고난을 받았을까요? 배고픔의 고난이 있었겠죠? 그리고 관계의 고난들이 있었어요. 불만족의 고난들이 있었어요. 그런 슬픔의 고난들을 하나하나 예수님께서 받으셨다고 얘기를 해요. 저는 이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은 예수님을 우리가 언제 가장 잘 알까, 라는 생각을 했을 때, 우리는 내가 편안할 때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내 문제가 해결되면 예수님을 점점 더 알아갈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성경은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지점이 뭐냐면, 너희가 고난에 처해 있었을 때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얘기를 해요. 왜요? 예수님께서 그 고난을 우리를 위해 먼저 걸어가셨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아픔은... 여러분,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 기분 좋은 것 아니죠, 그렇죠? 특별히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 그거는 내가 실패자이고 낙오자라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들이에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 즉 사회적·종교적인 지도자들, 인정받는 자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게 돼요. 어떤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이요.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 오히려 그것들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축복이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능력이라고 요한계시록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남은 자’라는 사상을 얘기를 해요. 남은 자 사상의 근원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림받았다는 것이에요.

왜 예수님께서 버림받으셔야 되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왕이신데도, 왕으로 이 땅에 오시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면 인정받으셔야 되는 거예요. 모든 지도자들로 하여금 인정받아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순종과 복종의 선언을 받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얘기하는 건 뭐냐면, “내가 버림받을 것이다”라고 얘기해요. 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어린 양으로 오셨다는 것, 죽으러 오셨다는 것들을 저희가 기억해야 하는데, 왜 죽으러 오셨냐 하면 우리의 죄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었잖아요. 이 의미를 우리가 놓치면 오늘 본문은 별로 중요하게 나한테 와 닿지 않아요. 남의 얘기가 돼버리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뭐냐면, 너희가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존재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존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거죠.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인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인자로서 이 땅에 오신 유일한 이유일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된다는 거죠.

저는 캄보디아 선교를 갔다 오면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어요. 그것이 뭐냐면, 주일날 저희가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 교우들을 방문하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팀이 한 교우를 방문했어요. 그런데 그 교우들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그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다 공통점이 있었어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감사하는 고백들이 있었어요. 제가 방문한 가정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를 아주 신비적으로 경험하게 됐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놀랍게도 너무나 많은 핍박을 당하는 거예요. 그 마을 안에서 정말 여러 가지 말할 수 없는 차별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고백들을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계속 당하고 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은 뭐냐면, 그 가정의 고백들 속에 예수님을 다르게 보고 있는 거예요. 축호 전도를 갔을 때는 그냥 다른 신들 가운데 하나였어요. 그런데 그 교우의 가정에서, 그 교우의 고백을 들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 인생의 전부였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하고 자기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신다는 고백 자체가 너무너무 감사하고요, 듣는 내내 제 마음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뭐가 달라진 거죠? 뭐가 틀린 거죠? 바로 이 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세울 수 있었어요. 그 관계는 어떻게 세웠을까요? 그 인자가 자신의 구주이심을 경험한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죄악 가운데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사람 되었다는 것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핍박받고 고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기쁨으로 여겨요. 그래서 그녀가 그 고난을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에, 전에는 친척들이 그녀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했는데, 어느 정도 몇 년이 지나고 또 몇 년이 지나니까 그 친척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가정이 축복의 통로가 되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는,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을 불러요. 어떤 사람은 저렇게 예수님을 불러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을 불러요” 하고 얘기할 수 있어요. 근데 우리의 진정한 질문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여러분이 답하셔야 돼요.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 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어쩌면 세상과 똑같이 “예수님 좋으신 분이에요. 예수님이 내 문제 이렇게 해결해주셨어요. 예수님이 그래서 나한테 이러한 복을 주셨어요”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항상 영광을 받으셔야 됩니다”, “예수님,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아 계십시오”, “예수님은 결코 낮은 데로 가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 나를 이끌고 높은 데로 가셔서 찬양과 영광을 받아주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모르고 사는 존재일 수도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영광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어린 양으로 죽기 위해 오셨어요. 그리고 이제 다음 주에 저희가 살펴보겠지만,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나요? 십자가의 삶을 요구해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요구해요. 왜요? 왜 우리는 그 삶을 따라가야 될까요? 왜 그러냐면, 아직 예수님의 완벽한 세컨드 커밍(재림)이 오지 않으셨으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남은 자처럼 살아야 돼요. 그런데 남은 자로서 무엇을 증거하면서 살아야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에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저희,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고백하셨을 때, 그의 삶과 동참하는 삶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캄보디아를 갔다 오면서, 벌써 제가 세 번째 갔다 오게 되는데요, 세 번째 갔다 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항상 늘 경험하는 게 뭐냐면, 캄보디아는 가면 특별해요. 왜 특별한지 아세요? 그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니까, 우리 갈 때마다 특별한 에너지가 오고, 특별한 힘이 오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돼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뭐냐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특별하다는 거예요.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이 그 특별함을 경험하셨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의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그 특별함에 연합한 자라고 성경은 얘기를 해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이 땅에서 걸어갈 길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길이에요. 다른 사람의 칭송과 찬양을 받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참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때 우리는 뭘 경험하냐면, 특별함을 경험해요.

이게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우리는 높은 자리, 영광받는 자리에 갔을 때 특별함을 경험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낮아짐으로 특별함을 경험한다고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어떤 분에게는 이 이야기가 약간 우울하게(depress) 되고 답답하게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기독교는 되게 역설적이에요.

여러분, 그걸 한번 경험하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낮은 곳에 갔는데, 그 낮아짐이 오히려 나에게는 강함이 되는 경험. 누군가를 위하여 사랑하고 희생하고 내가 손해 봤는데, 다른 사람에게 볼 때는 멍청이고 바보고 손해 보는 짓인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안에 큰 기쁨이 나오는 거예요. 놀라운 감사와 기쁨이 나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그런데 성령 충만한 자들은 그것을 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해요. 내 상황이 자꾸 이상한 쪽으로, 불투명한 쪽으로 흘러가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에게는 놀라운 평안이, 놀라운 평강과 그리고 샘솟는 기쁨과 열정이 우리 안에 나와요. 왜요?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걱정스러운 눈길로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답답해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천국의 기쁨으로 이것을 이겨낼 하나님의 그 섭리를 바라보는 소망을 갖게 돼요. 왜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저는 하사나교회 성도님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들이 이 부활의 기쁨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그 능력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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