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10-17절 오병이어의 기적
누가복음 9장 10-17절
10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뱃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안히라 하시니 15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은 후 16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여러분, 환영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디를 가든 환영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저희의 욕구요, 저희가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환영받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에 저희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나와 다른 사람을 환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환영하기란 더욱 쉽지 않은 사회에서 저희가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수선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미덕, 품성은 무엇일까요? 저는 최근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성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미덕과 품성을 우리가 많이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사람들을 환대하기는커녕 배척하고 나누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고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서로를 배척하고, 환대하지 않고, 쫓아내는 일들을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모두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미덕 중 하나인 환대하는 것, 불쌍히 여기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누는 일들을 놓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놓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환대받지 못할 자였는데 환대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빚진 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 단순히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양적인 변화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환대하시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이라는 사실을 저희가 함께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10절에서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도들이 돌아와,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본 전도 여행으로부터 돌아온 것입니다. 전도 여행이라는 사건이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열두 사도를 통해서 새로운 민족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열두 지파를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 열두 사도를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 즉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시작하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원리와 원칙들, 어떻게 복을 받는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을 저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보내셨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과 권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그들을 쫓아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저희가 살펴보는 누가복음은 매우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좀 더 구체적입니다. 마가복음 6장 3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지금 사람들이 제자들을 보고 쫓아온다고 마가는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후반부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저는 오늘 이 단어가 본문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의 '영접'이라는 뉘앙스도 있지만, 영어로 하면 'welcome', 즉 환영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환영했다는 것, 영접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아, 잘 오셨습니다.' 이 정도의 의미일까요?
마가는 이것을 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왜 불쌍히 여기셨을까요? 에스겔서 34장 5절에 기록된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왜요? 목자가 없어서 이제는 들짐승에게 잡혀 먹히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목자는 누구십니까? 정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왕들을 통해 당신이 목자 되심을 보여주려 하셨고,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나타내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왕이 하나님 앞에 패역했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된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2000년 전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누가는 전도 여행 이야기 후에 의도적으로 헤롯 왕을 등장시킵니다. 전도 여행의 주인공은 제자들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놀라운 기적들을 베풀었기에 사람들은 그 기적을 보고 제자들을 쫓아왔습니다. 그러면 주인공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제자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장치로서 헤롯 왕을 등장시켰습니다. 헤롯은 제자들이 행한 일들을 통해 '예수가 누구인가?' 그에게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헤롯의 질문은 많은 제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보낸 예수 한 사람에게 중점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장치는 이것입니다. 헤롯은 분봉왕으로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목자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왕의 역할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헤롯이 했던 일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메신저 역할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오늘 본문은 '누가 우리의 참 목자이신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목자는 바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이 기적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헤롯은 왕으로서 성전을 보수하고 로마의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려고 노력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된 목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의 기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영이 어떤 의미라고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제 곧 저희 교회에서 캄보디아 단기선교가 시작됩니다. 저희가 NLMA에 가입하고 나서 두 가지 중요한 사역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 일과 캄보디아의 CIA 학교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네 개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참했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며 캄보디아 선교와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 외에 다른 분들이 캄보디아에 직접 가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본 적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 김홍길 집사님과 김광지 집사님이 가셔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보고 사역하고 돌아와 발표하시면, 우리가 캄보디아와 조금 더 가까워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캄보디아에 갑니까? 캄보디아 사람들이 괜찮아서 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캄보디아에 가는 이유는 그들이 불쌍해서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의 뉘앙스를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가난해서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지식이 부족해서 불쌍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움과 영생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캄보디아에 가는데, 어떤 사람은 환영하고 어떤 사람은 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올바른 태도일까요? 아니겠죠. 우리가 간다면 그곳의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캄보디아 사역 중에 프놈펜의 'VOP'라는 사역지를 방문합니다. 그곳에는 베트남 난민들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역사적인 사건 때문에 베트남 난민들이 강가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캄보디아의 정규 혜택을 받을 수 없어 보트 위에서 삽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캄보디아 사람들은 배척하지만 저희는 가서 사역을 합니다. 캄보디아 사람도 불쌍히 여겨야 하고, 그곳의 베트남 사람들도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영한다'는 것에는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너무 좋은 게,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현대 신학의 관점으로 보면 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요? 이 사람들은 제자들의 기적을 보고 쫓아온 것이고,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우리가 분별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이러한 사건을 '천국 잔치'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느냐고 신학적으로 따져 물을 수도 있습니다. 천국 잔치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질문하거나 딴지를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천국의 한 가지 원리를 이야기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데에는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부르지 않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오는 사람들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환영하고(welcome) 계시는 겁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올바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신다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천국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가르치시는 거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산학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서 '나는 누구에게만 복음을 전하겠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쌍히 여겨 누구든지 환영하는 것입니다. 구분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만 더 확장하고 적용한다면, 교회는 복음을 통해 하나 된 자들이 예배드리며 천국의 삶을 나누는 곳임은 당연하고, 더 나아가 이 어려운 시대를 향하여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피난처가 되어야 하고,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교회에 와서 이곳이 안식처가 되고, 위로와 힘과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환영하셨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민자이지 않습니까? 이민 교회에는 불법체류자로 살아가시는 분들도 꽤 많습니다. 저는 요즘 그런 분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이제는 정부가 교회 안에 들어와 불법체류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질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성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긍휼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밑지더라도, 우리에게 좀 피해가 있더라도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복음을 나누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피해 보지 않고 나 자신을 나누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백 번 이야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이 그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래서 11절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셨다(welcome)"는 이 단어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왜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함, 무지, 부족함조차도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정말 날카롭게 비판하셨던 그분께서, 지금 이 무리는 환영하시고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아마 제자들은 으쓱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해서 지금 나를 보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쫓아왔구나!' 그래서 12절에 보면, 열두 사도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녁이 되었는데 이들에게 먹을 것이 없으니, 마을로 보내 먹을 것을 좀 얻게 하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13절에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가진 인식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보고 사람들이 쫓아왔다고 하는데, 과연 너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주신 권능과 권위만큼뿐이라는 겁니다.
제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빌립이 '이백 데나리온이 있어도 부족하다'고 계산합니다. 그들은 계산했고, 그것이 그들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으로 먹을 것을 사 오든지, 아니면 사람들을 보내서 배고픔을 해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가진 해결 방식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도 나름의 해결 방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은 '과연 우리의 해결 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맞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저녁때까지 기다리셨고, 14절에서는 제자들에게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도적으로 만찬의 배경(setting)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공식적인 의식(ceremony)이 시작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계속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궁극적으로 천국 잔치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 천국 잔치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이렇게 행하십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왜 이렇게 많은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보고 축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십니다. 그리고 '떼어서 주신다'는 동사를 사용하십니다. 이 동사들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그대로 재현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떡을 떼고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결국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앞으로 있을 마지막 만찬과 천국 잔치를 위해 그가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자기의 몸을 내어주시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될 것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희생 제물이 되시는 것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환영받지 못할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쫓겨나야 할 존재,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다음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천사들이 화염검을 들고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죄인이 다시 돌아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원히 죽을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희생 제물이 되셨고, 그 피가 우리에게 뿌려져 우리가 깨끗해졌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환영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병이어 잔치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은 양적인 확장,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 명을 먹일 만큼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에 감동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인간적인 사랑의 확장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기적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사랑,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의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미리 보시면서, 자신이 하실 일을 통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의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셨고, 그래서 이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즉 환영받은(welcome)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천국을 소유했다고 고백하며,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예수를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요청되었습니다. 2000년 전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도 땅 끝이고, 캄보디아도 땅 끝입니다. 캄보디아로 단기선교를 가시는 분이나, 지금 이곳 엘리콧시티, 메릴랜드에 사시는 분이나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를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환영하셨다(welcome)'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으셨고, 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을 환영하지 않는 자를 여러분이 환영하셔야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밥상 교제를 나누셔야겠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주신 것들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는 길이라고,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의 만찬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풍요로움 그 자체입니다. 이 말은 그 풍요로움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나눌 게 없어요"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것을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물질이나 시간, 열정을 나누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나누라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완성된 것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나누라고 말입니다.
저는 거기에 화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늘의 것들로 만족하고 있다면, 땅의 시간과 물질, 열정은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과 열정과 물질 또한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그런 일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만찬을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