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19-21절 새 가족
누누가복음 8장 19-21절
19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가족’이라는 단어처럼 따뜻한 단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가족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제가 국민학교,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족사진을 보면 대가족 사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면서 가족사진이 사실은 엄마, 아빠 그리고 자녀들만 있는 그러한 구성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가족’ 하면 핏줄을 나눈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우리 핏줄을 나눈 가족. 핏줄이 진하죠, 그렇죠? 핏줄을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 있고, 핏줄을 위해서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일들. 그런 것들을 우리는 가족이라고 생각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홀로 이민 오신 분들은 핏줄을 나눈 가족이 많은 분들도 있지만, 없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홀연단신 오셔서 아무도 없는 분들 말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 ‘가족’이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에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이웃 사촌’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어떻게 보면 핏줄을 나눈 사람보다 이웃 사촌이 더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한국에서도 많이 쓰이지만, 미국 이민 사회처럼 그 말이 와닿는 경우가 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 어떤 분이 “저희 이모님이세요”라고 소개를 하는데 얼굴이 전혀 안 닮아서 의아해하면, 사실은 정말 가까운 이웃 사촌인데 그냥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경우입니다. “우리 고모예요”, “우리 조카예요” 하는데, 사실은 피를 나누지 않았는데 조카가 되어버리잖아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이 이민 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교회 공동체나 어떤 공동체가 주는 친밀함이 핏줄을 나눈 가족보다 더 친밀하고 더 희생적인 것들을 저희는 경험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가족을 이야기했을 때, 어떻게 보면 공동체적인 의미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는 그 ‘언약 공동체’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해요. 언약 공동체 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풍성히 임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교회 공동체’라는 표현을 쓸 때 ‘세대 공동체’, ‘신앙고백 공동체’라는 표현들을 많이 쓰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저희 교회가 개척하면서부터 제가 신앙고백 공동체라는 이야기도 많이 썼지만, 사실은 우리가 ‘밥상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라는 표현을 많이 하긴 했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한문으로 식구(食口)를 음식을 나누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가족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이민 사회에서는 핏줄을 나누는 것보다 밥상을 나누는 것, 그것이 어떻게 보면 가족이라고 우리는 여겨왔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도 확장되고 있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저는 여러 부분에서 좀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오늘 본문은 되게 급진적인(radical)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렸을지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지금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나 부모라는 개념이 옅어졌다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 지금 내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는데 “그들이 진짜 내 가족이 아니고 당신들이 내 가족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정말 급진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 뭐냐면, ‘누가 진짜 가족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정의하고 있는 그 가족의 개념에 대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육신의 가족에 대해 되게 부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특별히 우리는 유교적인 문화에서 자라 왔습니다. 유교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효(孝)’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가 되게 중요해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을 들으면, 제가 볼 때는 유교 유생들은 이 말을 들으면 치를 떨 것 같아요. ‘어떻게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한테 부모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말을 하느냐’고 정말 분노에 찰 수 있을 것 같아요. 100년 전 한국에서 유생들에게 이 성경 본문을 이야기했다면 정말 난리가 났을 본문일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읽고 계십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마가복음 3장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데 거기에 있던 예수님의 친척들이 보이는 반응은 “그가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만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친척들,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환영받지 못한 대표적인 도시가 어디였죠? 나사렛이었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거기서 자라나셨으니까요. 자라났다는 말은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인지 다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어렸을 때 뭘 했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딱 서른 살이 되자 나오셔서, 그들이 정말 놀랄 수밖에 없는 기적들을 베푸시고 놀라운 성경 지식으로 예언자적, 선지자적인 역할을 하고 계셨을 때, 가족을 포함한 예수를 잘 알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미쳤다고 얘기하고 그의 권위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동생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이, 마가복음에서처럼 ‘이 사람들이 나를 불신하니까 나도 그들을 불신할게’ 이런 개념일까요? 그건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그래요. 누가 나를 불신하면 그럴 수 있죠. 부모와 자식 간에 절연하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상처와 아픔이 있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했는데 내가 널 어떻게 용서해 줘?”라는 식으로 우리는 분명히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런 의미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다른 말로 하면 ‘새로운 시대의 원리’를 얘기하고 계신 겁니다.
저희가 누가복음 6장에서부터 살펴봤었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평지설교를 통해서 옛 시대가 지나갔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시면서, 새로운 시대의 원리와 원칙을 이야기하셨던 것을 저희가 살펴봤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의 ‘가족’이라는 개념을 확장해서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새로운 시대의 가족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럴 때마다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렵고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이 너무 완고하고 굳건하기 때문에, 이 본문을 참 어려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부활하여 우리가 천국에 가면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의 아내일까요?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의 남편일까요? 여러분의 자녀가 자녀일까요? 천국에 가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족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될까요?
저희가 마태복음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이 부활 이후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 나와 질문을 해요.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었어요. 유대 관습상 남편의 동생과 결혼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동생도 죽었어요. 그렇게 아들이 일곱이 있는데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되다가 이제 여자도 죽었다면, 천국에 가서 부활한 다음에 이 여자의 남편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어요.
여러분,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얘기하신 것은 “그것은 너희가 부활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천국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거예요. 천국에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 새로운 원칙이 있다는 거죠.
저는 그게 오히려 맞지 않나 싶습니다.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논쟁을 할 수 있지만, 천국에 올라가서도 가족이 그대로 있는다면 물론 좋은 면이 있겠죠.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여러분, 천국에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만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천국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만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는 곳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천국에 가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천국에 갈 확률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제가 장담하는데 100% 있습니다. 내가 성격상 그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가 있을 거라고요. 그러면 천국에 갔는데 그 사람을 마주치면 여러분 어떤 마음이 들까요?
지금 이 땅의 마음으로 얘기하면 싫은 마음이 들죠? ‘쟤 왜 여기 있어?’라는 생각이 안 들겠어요?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의 이야기를 할까요, 안 할까요? 하게 되겠죠. 만약에 내 마음에 불평과 화가 있다면 그것이 천국일까요?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천국은 기쁨이 넘치고, 우리의 죄 된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증거를 받고 있단 말이에요. 이는 우리가 자꾸 천국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만 이해하고 묘사하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모르겠어요. 천국에 가면 우리가 내 아버지와 내 자식을 알아볼 수 있는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알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왜요? 천국은 그 나름대로 더 소중하고 더 좋은 기쁨이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천국의 기쁨을 누릴 사람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지금 우리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반대로 되시면 안 돼요. ‘내 가족이니까 천국에 가서 만나야지’가 아니라, 천국에서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우리가 천국에서 만날 가족이라면, 아버지가, 내 아들이 나와 동일하게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아서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뭘 해야 되는 거예요? 지금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 지금 더 용서해야 한다는 것, 지금 더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 지금 더 내가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원칙, 새로운 논리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 새로운 논리의 원칙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실 때 끊임없이 바리새인들과 대척점을 형성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했을 때 하늘나라에 가는 사람, 랍비들이 생각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했을까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 할례받은 사람이어야 했어요. 어떤 랍비들은 할례를 받으면 그 순간 천국을 소유했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만, 핏줄을 가진 사람들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랍비들은 생각했었어요. 그들에게는 그 핏줄이, 할례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십계명을 완전히 지켜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그 십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 더 구체적인 부속 율법들을 만들어 놓고 “이거 해야 된다, 저거 해야 된다, 이거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맨날 따지는 거죠. 그래서 제자들이 길을 가다 이삭을 주울 때 “어떻게 주일에 너희가 이삭을 주울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져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실 때 “너희가 어떻게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도전을 하는 거예요. 왜요? 그들이 갖고 있는 율법을 지켜야 가족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만이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6장에서부터 지금 8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 가족은 누구여야 하는 거죠? 핏줄인 내 동생과 내 어머니가 가족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6장에서 8장까지 새롭게 가족이 된 사람들은 누구여야 하는 거예요?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8장 앞부분 설교는 안 했지만, 8장 앞부분에 누가 등장하죠? 여인들이 등장해요. 놀랍게도 그 당시 아무런 존중도, 아무런 능력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 여인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식구를 확장해 버리시는 거예요.
무엇으로 확장해 버리는 거죠? 관계로 확장시켜 버려요. 핏줄이 아니라 관계로 확장시켜 버리는 거죠. 그 관계가 어떠한 관계입니까? 21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확장시키는데, 그 가장 중요한 기초가 뭐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원칙은, 새로운 시대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에베소서 4장을 좀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사도 바울이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말씀에 근거하여, 가족이 무엇인가를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에베소서 4장 15절에서 16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릴게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뭐 하는 거예요?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곧 그리스도에게까지, 하나님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해요.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래서 우리를 뭐라고 얘기하죠?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각 지체가 되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지금 사도 바울은 가족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가족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린 새로운 시대의 가족이라는 것은 개체, 개체가 아니라 하나로 엮어져 있는 ‘몸’이라는 거예요. 따로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엮어져 있다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의 가장 핵심이 ‘오직 사랑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고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것입니다. 어디 안에서요? 사랑 안에서. 누구의 사랑 안에서입니까? 지체들의 사랑 안에서요?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요. 그리고 16절 마지막 부분에 어떻게 이야기하냐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뭐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족이 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얘기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 즉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들은 가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행할 수 있는 거예요. 내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어에 너무 익숙해요. 그렇죠? 우리는 자식을 사랑할 때도 어떡하죠? ‘내가 부모니까 사랑하는 거야.’ 그렇죠?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내가 자식이니까 부모를 사랑하는 거죠.’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얘기하나요? 그런데 우리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낳은 아들이니까, 다른 말로 핏줄이니까 내가 아들을 위해 최선으로 노력해서 아이를 잘 자라게 하는 거잖아요. 내가 부모니까. 그리고 내가 자식이니까 날 낳아주신 어머님, 아버님을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돌보는 것이 자식 된 도리니까.
그런데 그것은 기독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얘기할 수 있고 모든 소위 말하는 도덕적인 주제를 가진 철학과 사상 속에서 그 이야기를 해요. 중요한 건, 지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뭐냐면, 너희가 왜 사랑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육체적으로, 생리학적으로 내가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거죠.
가족이라 함은, 우리가 제일 먼저 정리를 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분, 왜 아내를 사랑하십니까? 왜 남편을 사랑합니까? 내가 사랑해서요? 내가 정말 결혼 서약을 했을 때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그 말 때문에, 그 선언 때문에 여러분 사랑하십니까? 그런데 그러시면 안 돼요, 여러분. 여러분이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는 건 여러분의 약속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내를 사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드러났던 것처럼,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에베소서에서 얘기하면, 그러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그 비밀을 더 알아가기 위하여 내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에베소서 4장을 보면 바로 그 이야기를 한 다음에 옛사람과 새 사람을 비교해요. 옛사람은 정욕과 인간의 육신에 근거하여 살아간다고 얘기해요.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의 가족을 옛사람에 근거하여 우리가 정의하고 있는가? 우리가 지금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옛사람에 근거하여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가 가족이라는 개념을 확대해서 공동체로, 이웃 사촌까지, 교회 공동체로까지 확대했다면, ‘우리는 옛사람에 근거하여 사랑하고 있는가? 육체의 정욕에 의하여, 내 마음에 끌리는 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저 사람이 날 사랑하니까 나도 사랑해야지,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새 사람의 원칙을 얘기해요. 23절과 24절입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을 입으라’는 얘기는,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우리가 새 사람이 되었어요. 새 사람은 뭘 한다고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아 가는 자예요. 어디 안에서요? 사랑 안에서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새로운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그 사랑 때문입니다. 내 죄, 내 근본적인 문제. 여러분, 이 죄가 가정을 파괴한다는 걸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을 때 “보기에 좋았더라”고 얘기하셨어요. 완벽했어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마자 파괴했던 게 뭔지 아세요? 부부의 관계를 파괴시켰어요,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파괴했어요.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죠? 형제의 관계를 파괴시켜 버렸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첫 번째 살인 사건이 뭐예요? 결국은 죄 때문에 그래요. 욕심 때문에, 교만 때문에. 그 죄가 가정을 파괴시켜요. 여러분, 옛사람의 삶은 결국 죄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누가 오신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건 뭘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고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가장 소중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는 것이다. 내가 가장 소중한 걸 희생하면서까지 너희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라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내 가족’이라고 얘기하시는 순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돼요? 예수님께서 하셨던 삶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 내 생각에 근거하여 사랑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내가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내 가족을 사랑하는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랑이 내 아내와 내 자식들, 내 부모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다면, 저는 공동체에도 당연히 영향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말씀은 되게 급진적이에요. 우리는 ‘그럴 수 있지’라고 성경을 읽지만, 2000년 전에 이 말씀은 정말 놀랍도록 급진적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가족 관계를 파괴하는 듯한 놀라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가족의 개념을 확장하고 계십니다. 그 확장성의 혜택을 받은 사람, 유익을 받은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이제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었어요. 무엇 때문에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요.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일에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에요. 그것이 이 공동체가 가족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진짜 가족입니까? 저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우리의 핏줄을 나눈 가족이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고, 서 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가족을 위해서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셔야 돼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간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분 간절히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가족이, 이 핏줄을 나눈 가족이 천국에 갈 거라고 확신하고 계신다면, 그러면 천국에서 누릴 그 사랑을 이 땅에서 가족끼리 나누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내가 희생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희생하도록,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낮추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처럼 더 희생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왜요? 천국이 우리의 소유니까.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거니까. 이 땅에서 그거 하라고 우리에게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주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너무나 감사하게 우리의 가족이 하나님 나라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면, 이 땅에서 더 기쁘게, 더 누려야 하는 것 맞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 이 공동체가 완벽하지 않아요. 그리고 부족해요. 늘 불안하고 답답해요. 그런데 이 공동체가 이 땅에만 있다면 그게 문제가 될 수 있겠죠. 그러나 우리의 공동체가 천국의 것들을 소유한 자들의 모임이라면, 우리는 더 담대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더 감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이 더 기뻐하고 더 사랑을 누리는 이 공동체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전 확신합니다. 만약 우리 가족이, 우리의 공동체가 그런 것을 붙잡고 누리고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가든 그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 한국에, 그리고 미국에 이러한 문제들이 터졌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왜 누군가를 저주하고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빛이 되고,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보여주고, 세상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는 모습들. 저는 우리의 가정이 변하고 우리의 교회가 변한다면,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