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장 16-18절 등불의 빛
누가복음 8장 16-18절
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러분, 좀 답답하지 않으셨어요? 구약에는 상당히 그런 말이 많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에게 그런 표현들을 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들을 귀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의 빛이 전파된다는 거죠. 오늘 본문과 연관 지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일반적인 은혜 안에서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떠한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설교 앞부분에서 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은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어떤 사실을 보고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 저렇게 믿을 수 있지?’라고 답답해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이게 뭐지?’라고 하는 경험을 제가 이번 주간에 좀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화요일 날 정말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해서 제가 이번 1주일 동안에 정신이 나갔던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그냥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일들에. 이게 말이 안 되죠. 한국에 계엄령이 일어났는데 미국에 사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그 계엄령 때문에 1주일을 그냥 ‘이게 뭐지?’라고 하며 그 마음도 허하고 정신이 없고, 이런 일들을 경험했어요.
왜 그러냐면 제가 마지막 계엄령이 있었을 때 국민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러니까 뭘 알겠어요? 국민학교 6학년이 뭘 경험했겠어요? 저희가 서울에 있어서 그런 부분들을 봤지만, 사실은 국민학교 6학년이 지나고 제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접적으로 듣게 됐잖아요. 그러니까 제 안에 그런 것들이 체화되었었던 거예요. 제가 인식하게 되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그걸 듣고 ‘이게 도대체…’ 걱정들이 앞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보고 읽고 하는 내용들이, 다들 걱정하니까 ‘나하고 생각 같은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문득 ‘나하고 다른 생각하는 사람은 뭐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처음으로 구글링을 했습니다. 구글링해서 어떤 목사 이름을 치고 그리고 유튜브에 가서 봤어요. 근데 그때 딱 토요일 날 투표하는 중에 광장에 모였더라고요.
광장에 모여서 그걸 한 5분, 10분을 보면서 제 모든 생각이 딱 멈췄어요. ‘도대체 이게 뭐지? 도대체 무슨 일이 보여지는 거지?’ 사람이 너무, 너무 많이 모인 거예요, 광화문에. 그리고 깃발이 흔들리고, 그리고 거의 80년대 저희 옛날에 부흥했던 그 부흥회의 모습 플러스 북한 군중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지금 뭐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 이게 혹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아주 좋은 예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왜 그러냐면 그것을 주최하는 목사님은 거의 대부분의 장로교단에서 이단이라고 규정한 목사님이에요. 근데 한국 교회 안에서 너무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국 장로교 대표 교단들이 다 이단이라고 하셨고, 어떤 분은 심지어 목사라고 하지 않아요. 그냥 ‘누구누구 씨’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목사 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더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여러분, 등불은 소위 말해서 우리가 아주 쉽게 얘기하면 촛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촛불을 어디다 둬야 되죠? 등경 위에 둬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야 온 집안에 빛이 비춰지는 거잖아요. 근데 만약에 그 빛을 그릇 아래 두거나,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면 어떻게 되죠? 방이 어두워지는 거죠. 분별이 안 될수록 어둠 속에 있게 된다는 거죠.
저는 그 광화문에 있는 일을 보면서, 거기 화면 좌편에 뭐라고 쓰여 있냐면 ‘기독교 무슨 TV’ 뭐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화면을 채우고 있는 것이라든지 그리고 거기서 얘기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예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없어요. 심지어 그들이 찬양하고 있는 게 뭘 얘기하냐면, “내 목숨을 바쳐서 조국을 위해, 내 목숨 조국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겠다”고 얘기해요. 그런데 부활의 신앙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잖아요. 그렇죠? 부활 신앙의 근본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썩어져 없어질 이 세상, 이 나라들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왜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으로 오셨다고 얘기하셨어요. 그런데 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것이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의 현실이었어요.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께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덮으려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비판하며 지적질하며,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죄인들과 함께하는 랍비가 될 수 없는 자로 여겼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복음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그 복음을 가리고 있습니까? 그 복음을 우리가 전해야 된다고 얘기하는데, 과연 어떠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좀 잘 살펴봤으면 좋겠어요. 왜 그러냐면 이 이야기는 사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연관되어 있어요. 그 씨 뿌리는 자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들이 있어요. 17절을 보면 이렇게 얘기해요.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지금 여기서 뭘 얘기하고 있는 거죠? 지금 이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유를 얘기했는데 그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해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지금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거예요?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의 나라였어요.
이 당시에 종교가 많이 타락했죠. 어떻게 타락했죠? 심지어 제사장 직분을 사고파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대제사장 직분이 로마와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것을 사고파는 일들이 그 가운데에 일어났어요. 예수님께서 사역 처음과 마지막에 하셨던 일들이 뭐예요? 성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해요? 장사치들을 쫓아내면서 “이곳은 내 아버지의 집, 기도하는 곳이라”고 얘기했잖아요. 뭐라고 하는 거죠? 종교가 타락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러 왔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400년 전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뭘 이야기하고 있죠? “내가 정말 이 성전의 문을 닫고 싶다”고 얘기하시는 그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봐야 돼요. 왜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왔지만 그들이 드리는 제물은 어떤 거죠? 상처받고 흠 있고 다리 저는 것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을 드려야 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데 흠 있고 부족한 것들로 드렸단 말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 얘기하면, 현재 말로 얘기하면 정말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했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되신 그 복음으로 즐거워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예요. 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답답함이 있고 불평이 있고 불만이 있을 수 있어요. 민수기 21장을 보면 4절에서부터 9절에 놋뱀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제가 읽어 드릴게요.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고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그러니까 민수기는 의도적으로 지금 이 광야 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얘기해요. 근데 그들이 어떻게 됐다고요? 마음이 상했다고요. 그들 마음에 불평과 불만이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요.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그러면서 이제 불평에 대한 얘기들을 해요.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며.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어떤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유월절의 그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이에요. 홍해를 건너가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어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에요. 근데 그 광야에서 뭐라고 얘기하죠?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고 얘기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이것을 현재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올 수 있어요. 우리가 구원받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은혜를 받았을 때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어요. 하나님의 긍휼하심, 사랑 때문에 우리는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이 땅에 살아갈 때 우리의 상황을 보니까, 하찮아 보이는 거예요. 음식들이 별거 없는 거예요.
왜요? 누구에 비해서?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내가 별로 좋은 집에 사는 것 같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그렇게 좋은 음식을 먹는 것 같지 않고, 그렇게 성공하지 않은 것 같고, 그렇게 건강하지 않은 것 같고. 그러니까 인생이 어떻게 보이는 거예요? 하찮아 보이는 거예요. 별 볼 일 없게 보이는 거예요. 별 볼 일 없는 인생,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불평할 수밖에 없죠.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게 되었죠.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이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광야의 삶을 봤을 때 ‘거룩해지는 성화의 삶’이라고 우리는 신학적으로 얘기해요. 그러나 그 성화의 삶이라는 의미는 매번 거룩해지고 거룩해져서 정말 대단한 경지의 거룩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출애굽기를 보거나 민수기를 보거나 신명기를 봤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질책하는 근본적인 모습은 어떠한 모습이냐면,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 불평불만, 원망했었던 자들이에요.
근데 여기서 핵심이 뭔지 아세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뭘 베푸셨다고요? 긍휼하심을 베푸셨다는 거예요. 자비하심을 베푸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은혜예요. 그러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죠? 민수기 2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세요. 어떤 심판이죠? 불뱀이 와서 그들을 물어 죽게 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뱀에게 물린 것처럼,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살 때가 참 종종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불평불만, 우리가 원망하고 했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자족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찬양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에게는, 우리 인생 속에서 가끔 정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벽을 만날 때가 있어요.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어요. 그때 여러분은 뭐 하시죠?
민수기 21장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포가 들려요. 그것이 뭐냐면 모세가 이렇게 얘기해요.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그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이야기에요.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모세가 이 장대에 들린 놋뱀을 보면 너희가 나을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볼 마음이 있었을까요?
마음이 상했고, 원망했고, 답답하고, 불평불만했는데 갑자기 불뱀이 와서 날 물었어요. 아무 희망이 없어요. 내 몸은 쇠약해지고 이제 죽는 것밖에 남지 않았어요. 근데 갑자기 모세가 놋뱀을 보라고 하면, 여러분 놋뱀을 볼 수가 있어요? 저는 안 볼 것 같아요. 제가 그 광야에 있으면. “무슨 귀신 씐 나락 까먹는 소리 하냐” 하면서 안 볼 것 같아요. 근데 어떤 일이 일어났죠?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낫는 일들이 일어나요. 이것은 놋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뭘 의지하는 거죠? 뭘 믿는 거죠?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유월절의 은혜를 다시 한번 돌아가는 거예요. 홍해가 갈리는 그 사건,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다시 한번 얘기해요. “이것으로 믿느냐? 내가 너에게 큰 것을 보여줄 건데, 그때 인자가 달리는 모습을 보겠다”고 요한복음에서 이야기를 해요. 뭘 얘기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는 것을 보는 자는, 그들에게 구원이 임할 거라는 얘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얘기하는 거예요. 장차 알려질 거라는 거예요. 지금은 숨겨져 있는데, 너희가 빛을 보는 자들은,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놋뱀을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는 자에게는 뭐가 주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사실이에요.
꼭 이럴 때 들어가는 단어가 있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금 누가복음은 8장이잖아요. 누가복음 끝날 때까지 그 이야기가 평행선처럼 지나가요.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라는 말에 듣는 자들과,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의 이 평행선이 끊임없이 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 후에도 이 평행선은 끊임없이 가고 있어요. 성령의 도움으로 보는 자가 있고, 성령의 도움으로 깨닫는 자가 있고,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의 노력으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어요.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경고의 내용들이 있어요. 18절에 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다른 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해요. “너희는 조심하여 들으라.” 무슨 말이에요? 집중하라는 얘기예요. ‘Attention’ 하라,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라,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어떤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가 있죠?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난주에 씨 뿌리는 자의 핵심은, 농부에게 소중한 씨를 의도적으로 어디에 뿌렸다는 거죠? 길가에, 바위에, 그리고 가시떨기에 뿌렸다는 거예요. 농부에게는 생명과 같은 그 씨를 거기에 뿌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시면서, 자기가 길가 같은 곳에, 세리와 같은 자, 그리고 창녀와 같은 자, 그리고 죄인 같은 자들에게, 길과 바위와 그리고 가시떨기 같은 자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뿌리시겠다는 얘기예요.
그것을 경험한 자는 뭐가 있는 거죠? 열매가 있는 자예요. 놀라운 기적을 보는 거예요. 분명히 뿌리가 내리지 않아야 될 곳에 뿌리내림을 경험하는 거예요. 줄기가 자라날 수 없는 곳에서 줄기가 자라나는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그곳에서 열매를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받을 거라고 전혀 상상하지 않았는데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걸 뭐라고 얘기하죠? 기적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세상의 기적은 어떤 기적이죠? 세상적인 기적으로만 얘기를 해요. 내가 없는 걸 얻는 것으로 세상은 기적이라고 해요. 내 문제가 해결되는 거, 그것을 기적이라고 얘기해요. 그러나 성도들의 기적은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내 안에 하나님의 계획이 열매 맺는 것을 기적이라고 얘기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뿌리신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것을요,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요. 여러분, 왜 빼앗기세요? 제가 그 광화문에서 가장 미치도록 답답한 게 뭔지 아세요? 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고 있냐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왜 그 하나님의 복음의 씨앗을 빼앗기고 있냐는 거예요. 다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거기에 가 있는 사람 대부분이 교회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근데 왜 거기서 그 씨앗을, 하나님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한다면, 왜 그것을 그 자리에서 빼앗기고 있냐는 거예요. 복음이 하나도,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그 사랑하심과 긍휼과 화해, 그런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그곳에서 왜 빼앗기고 있냐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이야기는 광화문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누구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이 빼앗기고 있습니까? 그러시면 안 돼요. 왜요?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뿌림을 받은 자예요.
누구를 미워해서, 누가 싫어서, 누가 정말 여러분에게 해코지해서 여러분의 신앙을 빼앗기면 안 돼요. 왜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상황이 어떻든, 그것이 길가든 그것이 바위든 그것이 가시떨기든 여러분은 어떻게 하셔야 돼요? 그 빛을 봐야 돼요. 어디에 서 있든, 여러분의 가정이 어떻든, 교회 공동체가 어떻든, 사회가 어떻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 해야 될 것은 뭐냐면 등경에 비친 그 빛을 보고 있냐는 거예요.
내 인생을 인도하고 있는 성령의 빛을 보고 있냐는 거예요. 내가 지금 죽음의 골짜기처럼 느끼지만, 그 죽음의 골짜기까지 뚫고 비추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영광의 빛을 보고 있느냐는 거예요. 그 빛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요, 어디서든 괜찮아요. 평안할 수 있어요. 왜요? 쫓아가면 되니까. 그 빛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거니까. 그 빛이 우리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되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그것을 받고 계십니까? 있는 것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잖아요,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뿌렸는데 그 뿌린 것을 거두고 열매를 맺고야 말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여러분의 상황을 핑계 대지 못해요. ‘난 지금 길가 같은 상황이야, 나는 지금 바위 같은 상황이야, 나는 지금 가시떨기 상황이야, 누군가 나를 유혹하고 있어, 누군가 나를 핍박하고 있어, 나는 지금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어.’ 여러분, 그것을 핑계할 수 없다고요.
왜요? 하나님의 씨를 뿌리셨으니까. 그리고 약속하신 게 뭐예요? 있는 자는 받을 거라고 약속하셨어요. 왜요?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농부가 의도적으로 그곳에 씨를 뿌렸다면 농부는 어떡하겠어요? 만약에 우연히 씨가 뿌려졌다, 내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흘리고 갔다면 농부가 신경 쓰지 않겠죠.
여러분의 복음이 우연찮게 여러분에게 온 게 아니라, 성경은 끊임없이 이제 복음서를 통해서 제가 끊임없이 얘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어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삭개오를 만났어요.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리의 집에 찾아가셨어요. 여러분, 우연히 가신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우연히 만나 주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의도적으로 찾아와 주셨어요. 그리고 여러분을 부르셨어요. 그러면 여러분, 그 농부가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떻게 한다고 약속하고 계세요, 여기서? 그냥 방치해둘까요? 마음대로 자라라고 내버려둘까요? 아니요.
어디까지? 예수님께서 그 불뱀에 물려 죽는 자를 위하여 놋뱀이 장대 위에 세워졌던 것처럼, 죽음의, 스스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하여 어디에 달려 죽으셨던 거예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신 거 아니에요. 어디까지 열심히 우리를 돌보신다고요? 우리가 길에 있어도 뿌리내리게 하시고, 바위에 있어도 자라게 하시고, 가시떨기에 있어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그것의 증거물이 어디 있죠? 우리 열심히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길을 뚫자는 열심이 아니에요. 우리가 가시떨기를 뚫고 올라가자가 아니에요, 여러분. 그걸 누가 제거해 주시는 거예요? 누가 뚫게 하시는 거예요? 바로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고 나서 또 다른 경고가 나옵니다. “없는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뭐예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누구를 향한 이야기죠? 바리새인들을 향한 이야기였어요. 종교 지도자를 향한 이야기였어요. 그들은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은 그들은 없는 자였어요.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깨달을 수 없는 그런 존재였어요.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깨닫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들의 열심으로 그들이 천국 시민이라는 것들을 확신에 차 있었어요. 여러분,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바리새인들과 한번 얘기해 보세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리고 확신에 차 있었을 거예요, 어느 누구보다 천국 갈 확신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시죠? 그들은 없는 자이고 심지어 그것까지도 다 빼앗기는 자들이 될 거라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거는 경고의 메시지겠죠.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는? 어디에 비추어서 고민해야 되죠? 이 이야기를 2000년 후에 우리가 듣는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될 지점은 뭐예요? 우리를 돌아봐야 될 지점은 뭘까요? 너희가 조심히 들으라고 했을 때, 뭐예요? 우리가 과연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되겠죠.
그런데 그 고민은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많이 고민하지 않으셔도 돼요. 왜요? 우리는 늘 그 고민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을 정도로 되게 나약해요. 그렇죠? 우리는 되게 연약해요. 한두 시간 정도는 열심히 하고 나서 ‘나는 뭔가 대단한 사람’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해요. 그래도 저는 저에게는 몰라도 다른 데 가면 꽤 괜찮은 사람처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치죠. 그렇지만 저는 조금만 지나면 제 자신에 자신이 없을 때가 많아요. 목사로도 자신이 없고, 신앙인으로도 자신 없을 때가 순간순간 와요. 그러면 저는 ‘내가 정말 제대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고 있는 건가?’ 내 연약함이, 나의 부족함이 정말 저 깊은 구덩이까지 저를 끌고 가요. 그것이 한 달을 지속할 때도 있고, 그것이 한 1년을 지속할 때가 있고, 그것이 몸을 피폐하게 만들 때도 있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만 그런가요? 저는 우리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가 그 연약함 안에 우리는 씨름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길가 같은 믿음의 소유자인가, 나는 바위 같은 믿음의 소유자인가, 나는 가시떨기 같은 마음의 소유자인가’ 늘 고민하고 한탄하고 절망하는 것, 그게 우리의 모습. 그게 우리의 답답함 아닙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기서 정말 조심하여 우리가 들어서 우리가 바라봐야 될 건 뭐냐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요, 예수님께서? “너를 위하여 내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걸 이야기해 주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희는 공동묘지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제가 종종 비유했었던 거 있죠? 공동묘지에서 빛을 대고 불을 비추면서 “나와! 나와! 빛을 보라!” 하면 볼 수 있을까요? 없어요. 공동묘지, 묘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빛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묘지에 있는 자가 아니잖아요. 여러분은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 묘지에서 나온 자예요. 눈이 뜨인 자란 말이에요. 생명이 부여된 자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 자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빛을 봐야 되는 거예요. 그 빛을 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죠? 만약에 내 안에 그릇으로 덮었던 것들이 있다면 그걸 여세요. 평상 안에 내가 그 빛을 넣어놨다면 이제 평상 위에 올려놓으세요. 무슨 말인지 아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유익되지 않는다고 덮어두지 마시고, 유익되지 않아도 세상에서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소중한 것이 되게끔 여러분 만드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한 세 번째, 네 번째 중요한 것으로 저 평상 밑에 넣어놓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걸로, 가장 우선순위에 두세요.
그게 있는 자들이, 그 빛을 보고 누릴 수 있는 그 축복을 향해서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고 그것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전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어요. 정말 교회를 다닌다고 늘 이야기해 왔던 것이지만, 교회라는 곳을 다닌다고 하나님의 백성은 아닌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도 그것이 분명히 있고요, 그리고 교회라는 곳 안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이단들이 수도 없이 많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을 지적하는 것, 쉬워요. 광화문 이야기하는 것, 쉬워요.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질문을 우리에게 했으면 좋겠어요.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귀 있는 자인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놓고 있는가?”
만약에 우리가 그 복음을 그릇으로 덮고 있었다면, 내 상황 때문에, 내 생각 때문에, 그러면 이제 어떡해요? 그 덮었던 그릇을 이제 빼어서 그 빛을 봐야 될 때예요. 평상 아래에 두었던,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면 이제는 그것을 내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환원해야 될 시점이 되었다는 것.
2024년도 이제 지나가고 있습니다. 항상 연말이 되면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되돌아볼 때 정말 소수만이 즐거워하고 자랑거리가 있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이에요. 그런데 그 절망에서 끝나면 2025년은 또 다른 절망으로 연결될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에서 희망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절망에서 능력의 힘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025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