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6장 27-38절 원수를 사랑하라

reformedmind 2025. 9. 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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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 27-38절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너의 이 빰을 치는 자에게 저 빰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7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안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의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바보처럼 사셨습니까?
참 바보처럼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딱 생각나는 단어가 '호구'입니다. 정말 호구 같지 않습니까?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돌려대야 하고, 겉옷을 빼앗아가면 속옷을 주라고 하고, 돈을 꿔줬는데 받을 생각은 말고 꿔주라는 것입니다. 정말 호구 아닙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호구처럼 살고 싶으십니까? 그게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시점에서 새로운 원칙, 새로운 나라의 원리를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데, 이 원리가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고 경험했던 세상의 원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머릿속으로는 '그래, 원수를 사랑해야지' 하면서도, 우리가 떠올리는 원수란 고작 '내 아내? 내 남편?' 정도에 귀결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정도 선에서 이해를 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이 내 원수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결론이 결국 내 남편, 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라면, 그 결론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닙니다. 내 아내, 내 남편에게는 이자 없이 돈도 빌려줄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겉옷을 달라고 할 때 속옷까지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말 '원수'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원수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수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여러분, 왜 남북 통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생각해보셨습니까? 왜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 이렇게 어려울까요?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왜 안 될까요? 저는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우리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북한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북한이 원수이기에 원수에게는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이지, 원수와 평화 협정을 맺을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철천지원수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으십니까? 다른 말로, 내가 용서해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원수일까요?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처럼 쉬운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하시면서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하고 계실까요?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내가 당연히 사랑해야 할 대상을 원수로 상정해놓고,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이제부터 좀 사랑해야겠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21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싸움이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22절부터 읽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러한 법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비슷한 법전에도 존재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왜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과 유사한 법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을까요? 이 율법의 의도는 복수를 과도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복수라고 하면 무협지에서처럼 자손 대대로 복수를 이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원수를 갚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죠. 그러나 이스라엘의 법은 바로 그런 과도한 복수를 막는 장치였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인정하되, 우리가 받은 만큼만 갚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원리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유대교나 함무라비 법전처럼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급진적이고 말도 안 되는 원리를 제시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해를 당하면 갚으려 하지 말고 용서해주고 사랑해주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33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십니다. 누군가 나를 선대하면 기쁘고 좋으니, 그에게 받은 도움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조차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 즉 선대하심에 대해 평생 그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원리는,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할 수 있습니까?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본능적이든 계획적이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가'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가 지난 4주간 보아왔던 '복과 화'의 근거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복 있는 자를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20절에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21절에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살폈듯이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복들은 매우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것, 나를 버리는 것, 환경 때문에 굶주리는 것, 어떤 상황 때문에 우는 것. 이처럼 핍박받는다고 할 때, 우리는 수동적인 상황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렇게 수동적인 핍박이 자주 일어납니까? 특히 미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받는 핍박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도한다고, 교회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말씀이 나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그 수동적인 복의 개념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동적인 상황은 나로 하여금 소극적이게 만들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신앙의 적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렵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복의 상황보다 어쩌면 더 현실적이고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능동적이며, 우리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새로운 나라를 선언하시면서 이러한 적극적인 순종을 요구하실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이것을 우리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십니까? 저는 장담할 수 있는데, 이건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가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 자식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보며 저런 사랑을 해야지'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막상 내 이야기가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이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요청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시기로 작정한 일이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완성하실 것인지에 대해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냉철하게 말해 우리의 존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원래는 사랑이 아닌 심판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귀의 자녀였고 하나님과 단절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원수를 사랑하셨고,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의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을 만족시키면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고, 그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얻고자, 하나님 나라가 궁금해서, 그가 참 진리를 말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의 고백에서 드러났고, 예수님이 법정에 섰을 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사랑을 베풀러 오신 분에게,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어 달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원수 사랑의 가장 큰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겉옷을 원했을 때 속옷을 내어주셨고, 뺨을 맞으셨을 때 다른 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는 수치당하심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고, 이 땅에서 하셔야 할 자신의 목적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그는 십자가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이 말씀은, 구약에서 과도한 복수를 금하기 위해 만들었던 장치를 뛰어넘어, 복수 자체를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아주 극단적인 모습을 당신께서 직접 행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나 누군가의 영웅적인 모습을 보고 나도 그 사람처럼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우리의 실수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본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원수를 사랑하신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만나는 원수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원수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굴곡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만나는 원수는 예수님께서 마주하셨던 그런 깊이의 원수는 아닐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듯,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험과 핍박은 우리가 감당할 만큼만 주어집니다. 그 감당할 만큼 주어진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가 걸었던 삶을 따라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그렇게 담대히 걸어가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단 한 가지 이유,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뛰어난 예지력이나 경험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가 주어졌고, 그 은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우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지금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고 모욕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어떤 모습일까'라고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과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은 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무한함과 영원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은혜만큼만 아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성경에 드러난 예수님의 '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가 참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을 때 돈을 갚으라고 요구했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만 달란트의 은혜를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이 악한 종아"라고 부르며 "내가 너에게 베푼 은혜를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경험한 용서의 은혜에 근거해서만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원수 된 자를 사랑하는 깊이는 내가 받은 은혜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리냐면, 결국 우리의 노력이 향해야 할 방향은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해야, 그것이 물같이 흘러넘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원수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 원수가 되고, 내 남편이 원수가 되고, 내 부모가 원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랑하지 못함을 정당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아십니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을 때 "내 돈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모습과 똑같아집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나도 이만큼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거야"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이 말을 안 들으니까 내가 사랑을 못 하지", "부모가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가 이만큼밖에 대접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게 됩니다.

우리의 눈은 자꾸 나에게 빚진 자, 나와 원수 된 자에게만 향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눈, 여러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통받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아셨습니다. 기도는 무엇을 위한 통로입니까? 하나님과의 통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조차 그렇게 하셨는데, 과연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기도로 채워져 있습니까? 기도의 내용이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내 삶 속에서 더 누리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내가 조금 더 편안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지금 웃게 해달라고, 내가 부유한 자가 되게 해달라고, 내가 칭찬받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너무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바로 20절부터 26절까지, 이 땅에서 복 받는 자와 화 있을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금 부유하고,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고, 지금 잘난 사람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기에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내용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기도의 내용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더 알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더 알게 해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통로가 되고 원천이 되어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함으로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식이 겉옷을 달라고 했을 때 속옷까지 줄 수 있는 것이고, 내 아내가 내 뺨을 때렸을 때 다른 뺨을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 않습니까?

쉬우신가요? 아내가 한마디 하면, 제가 이제 결혼 27주년인지 28주년인지… 이거 틀리면 혼나는데, 하여튼 그동안 한 번도 다른 뺨을 대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혼 초창기에는 선배들이 항상 "야, 초반 기싸움에서 지면 안 돼. 무조건 이겨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안 나아지더군요. 20년이 지나도 안 나아집니다. 30년이 되어도 안 나아질 것 같습니다. 왜일까요? 내가 내 힘으로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화해하려 하고, 내 힘으로 긍휼을 베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본을 돌아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만 그럴까요? 부모와의 관계도, 자식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게 안 되면 공동체에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공동체에서도 안 된다면 세상에서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원수에게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하겠습니까? 안 됩니다. 안 되는 이유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호구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호구가 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에서는 지혜롭게 이자를 더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당신이 '갑'이 되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에서 '을'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갑'이 되어야 한다고 세상은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본문은 새로운 나라가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나라의 원칙은 '을'이 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어주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조건 없이 말입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조건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려움과 수치,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것도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신앙생활을 수동적으로 할 때 항상 나오는 핑계는 '상황이 그렇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핍박 안 당하는데요. 저는 가난하지 않은데요. 저는 주리지 않는데요. 저는 애통할 게 없는데요, 뭘 어떻게 애통합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축복해주셨는데!"라며 자랑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우리는 자랑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수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능동적인 하나님의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누가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완벽하게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는 그분을 따라 시도하는 일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되느냐 안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했느냐 안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손양원 목사님 같은 사람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며 걸어가셨던 것처럼, 지금 내 상황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점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능동적 순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해하는데, 능동적 순종은 100점을 맞거나 칭찬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 달란트 탕감받은 은혜가 있기에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봤을 때 "하하, 잘 지내니?" 하고 웃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너무 과대 포장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가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라고 단정하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신앙의 모습을 보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상 공동체 여러분, 제가 도전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냥 뭐든지 좀 해보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말입니다. 그런데 그 '뭐든지' 하게끔 만드는 힘은 여러분의 결단이나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내가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데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첫 발자국을 잘 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더 사랑해야지. 내 아내, 내 남편을, 내 부모를, 내 자녀를 이렇게 사랑할 거야. 공동체에서 이렇게 열심히 봉사할 거야.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그리스도를 전할 거야"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싶은 첫 번째 발자국은, 지금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좀 발견하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보장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만큼 여러분의 삶이 규정될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만큼, 여러분은 이미 실천하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드린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여러분의 나태함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정말 게으른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리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여러분이 순종하고 그 사랑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여러분의 인생에 평강이 있고,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진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과 달리,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것은 맛보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고, 경험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먼저 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누리고, 우리 하상 공동체가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냉철하게 말하면 지금 내 자신의 모습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있는 수준입니다. 정말 냉철하게 말하면 우리 가정의 이 모습이, 지금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있는 수준입니다. 냉철하게 말하면 우리 하상 공동체의 지금 이 수준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가정이고, 우리의 공동체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는 고민할 것 같습니다. '과연 이게 끝일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 은혜를 안다면, 내가 무언가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그 사랑을 안다면 지금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은혜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능동적인 신앙인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능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셔서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나누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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