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20-26절 복과 화 (4)
누가복음 6장 20-26절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여러분, 왕따 당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왕따'라는 말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말이죠.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수록 집단 의식이 상당히 강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집단을 만들고 공통분모를 찾으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요즘 유행어처럼 번진 학교 폭력, 즉 '학폭'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왕따 당하고 계십니까?
사실 오늘 본문을 준비하면서 설교자로서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을 받고, 멀어지고, 욕을 먹고, 악하다는 말을 듣고, 버림받는 일이 정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목사가 아니라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라는 핑계를 댈 수는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도들이고, 이곳 미국은 그리스도인이 참 많은 나라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핑계 댈 수 없는 무기력함과 안타까움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먼저 우리 안에 회개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이 일들을 내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읽을까요? 오늘이 복과 화에 대한 네 번째 설교인데, "복이 있도다"라는 결론 부분은 우리에게 와 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 될 것이고, 배부를 것이고, 웃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그래, 맞아" 하며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한번 확인해 볼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가난하십니까? 여러분, 주리고 계십니까? 여러분, 울고 계십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과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의도적으로 이런 것들을 부인하며 살아왔습니다. 가난해도 가난한 척하지 않고 살지 않습니까? 조금 과장되고 우스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가난한 분들이 헌금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오해 없이 들으셨으면 합니다. 물론 좋은 의도와 감사함으로 헌금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가난하지 않다'는 것을 헌금이라는 잣대로 보여주려는 모습이 교회 역사 속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많은 교회가 가난한 자를 대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 스스로가 자신을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의 편에 서기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계급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으면 합니다. 왜 예수께서는 2000년 전에 '가난'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왜 '주린다'고 하셨을까요? 왜 '우는 자'라고 하셨을까요? 그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고, 그들은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계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부유하고 상위 1%에 속한다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가난은 단순히 재정적인 가난이 아니라 영적인 파탄 상태,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주림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울 수밖에 없는 상태, 여러분은 그것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저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모든 것을 가졌는데도 스스로 가난하다고 고백하는 것, 주리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 울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오늘 본문은 의미가 있고, 우리 삶 속에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행복해 보이고, 저 스스로도 나름 행복합니다. 저희 하산나 교회가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가족 안에서 지지고 볶고 살지만 겉모습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에게 "너는 가난함을 고백하고 있는가? 주림을 고백하고 있는가? 지금 너는 울고 있는가?"라고 질문할 때, 목사가 아닌 한 명의 성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지 못한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니 세상이 저를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저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별반 이질감 없이,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왕따 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당연히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하는데, 지금 칭찬받고 인정받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정말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미움받고, 멀어지고, 욕을 먹고, "너는 악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복되다고 하실까요? 이것은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네가 속한 나라는 어디인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citizenship)은 땅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존재론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땅의 눈으로,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가치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쓴다면 당연히 세상의 인정을 받고, 세상의 잣대로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원칙과 전혀 다른, 심지어 구약의 전통과도 다른 새로운 율법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옛 율법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자랑하고 칭찬받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시며,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거짓 선지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칭찬받는 자여,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은 바로 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던 거짓 선지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심판, 즉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어떠한 가치관과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직도 율법에 근거하여 나 자신과 가정, 교회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 나라, 천국과 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호산나, 다윗의 왕이여!"라고 외치며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광은 순식간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미움으로 변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겪으실 일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여기서 '그날'은 단순히 먼 미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모든 약속을 완성하신 바로 그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우리에게는 이미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이 말씀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누려야 할 현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상상이 되십니까? 왕따를 당했는데 즐겁습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는데 기쁩니다. 악하다는 말을 듣는데 즐겁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바보 같습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 가사처럼, 참으로 복음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바보처럼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내 인생이 실패하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가 다른 사람을 왕따시키고, 내 것이 맞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을 배척합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진 국가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왕따를 당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왕따시키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보처럼 살기 싫고, 이 땅에서 지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회개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에서부터, 가장 작은 공동체 안에서부터 누군가를 왕따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임을, 어머니임을, 내가 뛰어난 사람임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서조차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의 경고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에스겔, 이사야, 예레미야는 하나같이 올바른 소리를 하다가 욕을 먹고 버림받았습니다. 반면 거짓 선지자들은 왕에게 듣기 좋은 말,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국 잘 될 것입니다"라는 말만 해주었습니다. 구약의 왕들을 보면, 선지자의 꾸짖음을 듣지 않고 좋은 말만 듣던 왕들은 결국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말을 듣고 싶으십니까? 여기서 핵심은 좋고 나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가난함과 주림과 슬픔을 고백하는 대신 오히려 자랑거리를 만듭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낡은 부대를 찢어버리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부대는 우리의 자랑거리나 세상의 가치관, 잘못된 종교적 틀로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새로운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 원칙은 세상에서는 환난과 고난, 소외와 무시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가운데에는 기쁨과 누림과 즐거움이 있다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삶으로 살아내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온 햇수만큼, 신앙생활을 해온 햇수만큼, 내가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는 어렵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부정할 때, 새로운 노트에 글을 쓸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나처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가진 자랑거리와 잘하고 있는 것들을 붙잡으려 하는 대신, 성령께 그것들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나를 내려놓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내려놓을 때 일어나는 일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래의 '나'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직업, 역량, 믿음 등 나를 정의하던 정체성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려놓는 순간, 나에게서 유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우리는 나의 것을 부인하고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길 끝에 약속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쁨과 뛰놂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보장(guarantee)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그 보장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일은 바로 기뻐하는 일, 뛰어노는 일입니다. 내 것을 버리고 예수로 채움으로써, 세상의 잣대로는 미움받고 따돌림당하는 바보가 될지라도, 상관없이 내 안에서 찾아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누리는 장소가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에서 바보가 되고 지쳐 돌아왔을 때, 가정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소가 세상의 잣대로 누군가를 칭찬하고 높이는 곳이 아니라, 정말 바보들이 모여 함께 웃고, 서로를 인정해주고, 기쁨의 잔치를 여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나는 가난합니다. 나는 주립니다. 나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 가운데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도전이라는 것을 압니다. 특히 저처럼 목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목사'라는 틀 때문에 제 마음속 진짜 이야기를 다 꺼내놓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무너지지 않고, 제 가난함과 주림과 울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설교가 다소 무겁게 들리셨을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그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이미 완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능력을 믿지 마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그 일을 완전히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완전함은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완전함을 바라보며 지금 시도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도 자체에 우리를 위한 상급(reward), 즉 기쁨과 누림이 있다는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일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천국의 상을 지금 누릴 수 있는 그 일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