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20-26절 복과 화 (3)
누가복음 6장 20-26절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남자는 울면 안 된다." 여러분은 집안에서 부모님께, 그리고 사회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오셨을 겁니다. 그래서 왠지 모르게 우는 것이 불편하고, 운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는 것을 부정하며 몰래 숨어서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드니, 저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더군요. 드라마를 봐도 울고, 음악을 들어도 울고, 조금 섭섭한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예전에는 숨어서 혼자 울었지만, 이제는 대놓고 울어서 아이들에게 '울보 아빠'가 되어버린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식의 교훈으로 이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웃는 자에게는 애통하며 울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단순히 행위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본문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매우 행위 중심적인 사고에 익숙해졌습니다.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하는 성취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심지어 도덕이나 인격조차도 성취에 근거해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 실패자로 낙인찍힐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무시당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원리는 세상의 원칙과 다릅니다. 한국 교회가 율법주의에 상당히 빠져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을 자꾸 행위 위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깊이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적 율법주의를 '복음'이라는 은혜로 회복시키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여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근거하여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느냐 웃느냐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웃는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당연한 질문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상합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고, 지금 웃는 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우는 것을 싫어하고 웃기를 원하는데, 본문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존의 행위 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오늘 본문에 접근해야 합니다.
먼저 25절 후반부,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복과 화에 대한 설교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리고 '지금'에 근거한 미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이는 구약의 언약 원리와도 같습니다. "지금 너희가 율법을 지키면, 미래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당시 이 말씀을 듣던 회중은 이러한 율법의 원리에 익숙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크게 낯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미래는 어떤 미래일까요?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원리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성경을 보면 때로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심판은 주로 '여호와의 날'과 같은 먼 미래의 일로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내가 지금 실수하면 하나님이 바로 심판하시고, 잘하면 바로 보상해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신앙은 종종 그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무언가 잘못하면 벌 받을까 조심하고, 큰 헌신을 하면 하나님이 지금 당장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신에게 높은 자리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미래를 가까운 미래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죽은 후에야 경험할 수 있는 천국에서의 먼 미래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울더라도 천국에 가면 웃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시편 기자처럼 "악인이 이 땅에서 형통하는 것을 보며 화가 나지만, 그들의 끝이 지옥임을 알기에 나는 괜찮다"라고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견해 모두 일리가 있지만, 오늘 본문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지금 웃는 자"가 애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웃음, 즉 건강, 돈, 화목한 가족으로 인한 기쁨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웃고 있다고 해서 한 시간 뒤, 1년 뒤, 10년 뒤에도 웃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지금의 웃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자만하며, 다가올 어려움을 외면하려 합니다. 그러나 부자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오늘 밤 하나님이 영혼을 거두어 가시면 쌓아 둔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의 웃음은 영원하지 않기에 허무하지만, 성도들에게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지금의 행위(우는 행위)를 통해 미래의 영원한 복(웃음)을 얻으려 합니다. 심지어 고난이 없는데도 믿음이 좋아 보이기 위해 일부러 힘든 척, 우는 척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세상적인 방식입니다. 내가 어떤 학위를 가졌는지,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자녀가 얼마나 잘되었는지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원리는 정반대입니다. '지금'의 내 행동이 '영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영원'이 '지금' 나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팔복의 핵심은 "무엇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복이 있도다"라는 선포입니다.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하늘나라, 즉 영생이 주어졌다는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영생을 소유한 자, 천국을 소유한 자는 울게 될까요?
여기서 말하는 울음은 '거룩한 슬픔'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와 고통에서 멀어져 행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웃음과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고 성경은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거룩한 슬픔'이란, 영원을 맛보았기에 세상의 웃음이 얼마나 덧없고 불쌍한지를 깨닫는 데서 오는 슬픔입니다. 단기 선교를 다녀온 아이들이 가난한 나라의 현실을 보고 와서, 자신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 사는지 감사하게 되고 동시에 그곳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영원이라는 가치를 알게 되면, 세상의 것들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 세상이 부러워하던 지식과 가문을 배설물처럼 여겼던 이유는 천국, 즉 영원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기쁨을 아는 자는 더 이상 세상의 웃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거룩한 슬픔'을 품게 됩니다. 내 잘못이나 자연재해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넘어, 아직 영원을 알지 못하고 헛된 것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거룩한 슬픔은 우리에게 현재를 초연하게 살아갈 은혜를 줍니다. 단순히 "나는 천국이 있으니 괜찮아"라며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울 수밖에 없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내면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과 자족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이 나빠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관계가 삐걱거려도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 즉 하늘나라가 이미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의 가장 위대한 본보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뻐하고 자족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분에게 가장 큰 기쁨이자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이민 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평범하게 살아오신 우리 부모님들의 인생만 돌아봐도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생하셨으니 결말이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냐고 기도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히려 그분들은 하늘의 것을 보았고 소유했기 때문에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자족하며 살아가신다는 점입니다. 하늘의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의 어려움을 뛰어넘게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울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금 웃고 계십니까? 이는 미래에 웃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넘어, 이미 우리에게 복이 주어졌기에 지금 우는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성도는 우는 상황 속에서 웃는 법을 배워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신비이자 기적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애통하며 울지만, 그 울음 속에서 문득 피어나는 웃음과 자족함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이 모든 일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주님을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만 붙잡고 나아가십시오. 한 걸음 한 걸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우는 중에 웃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의 가정이 바로 그 기적과 신비가 일어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걷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에 우리의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