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6장 20-26절 복과 화 (2)

reformedmind 2025. 9. 1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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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 20-26절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혹시 여러분, '보릿고개'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직접 경험하신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저는 사실 보릿고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저희 세대는 국민학교 시절 도시락 검사를 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쌀이 귀해 보리밥을 먹던 시대였기에 그 혹독한 보릿고개의 굶주림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보릿고개를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밥을 먹을 때 남기면 안 된다"는 교육은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똑같이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라고 말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실질적으로 보릿고개를 겪었던 사람과, 그 이야기를 지식으로만 듣고 관습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이렇게 설교를 시작하냐면, 여러분은 '주린다', '배고프다'는 개념을 어떻게 느끼고 계십니까? 사실 현대 사회는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이상, '주린다'는 의미와 그 절박함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무게감을 놓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다루었던 가난과 부자라는 계층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저소득층과 부유층의 개념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의 '주린 자'라는 말은 우리에게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으로 한번 돌아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경험했던 굶주림은 곧 생명의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소수의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100년 전 한국만 해도, 그리고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는 대다수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린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수많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설교자로서나 듣는 성도로서나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긴박성, 절실함, 간절함을 놓칠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우리의 절실함을 무디게 할 수 있는 본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절실해야만 합니다. 당시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실제로 배고팠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기적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질적인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는 기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던 1차 청중과 이 글을 읽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이 말씀이 주는 시대적인 긴박감과 절실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절실함이 2,000년이 지난 우리에게는 '영적인 절실함'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배고픔의 절실함은 없지만, 풍요 속에서 오히려 다른 형태의 영적인 굶주림과 갈망을 표현하는 수많은 사람의 문제를 직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 문제의 해결 방법이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복과 화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복과 화는 신명기 27장에 기록된 율법의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복이 주어지고, 지키지 않으면 화, 즉 심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이제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겼을 때'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 율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복과 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여기서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는 '지금'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지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25절에서도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지금'은 새로운 율법이 주어지는 바로 이 시점을 의미합니다. 옛 원리와 새로운 원리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옛 원리인 율법 아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배부른 자'요, '부유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25절은 말합니다. "화 있을진저 지금 배부른 자는 너희는 주리게 될 것임이요."

이 공식은 참으로 낯설지 않습니까? 2,000년 전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던 시절, 부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말은 "너희의 그 풍요로움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는 어떤 풍요로움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랑거리, 유익, 그 풍요로움을 빼앗긴다는 사실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오십니까? 아마 잘 와닿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대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정말 대체 불가능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족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가족조차 대체 가능하다고 말하는 시대이기에, 우리는 이 개념의 무게를 놓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대체 불가능한 것을 빼앗긴다면, 우리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처럼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대체 불가능한 영원한 생명을 빼앗길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긴박감 속에서 '주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이해해야 합니다. '주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간절히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일차적으로는 먹을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먹는 것에 열망을 느낍니다.

이 본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16장의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들의 원망은 단순히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누렸던 '풍요로움'에 근거하여 지금의 결핍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셔야 했을까요? 애굽의 풍요로움보다 더 뛰어난 것을 주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애굽의 고기 가마보다 더 큰 가마를 만들어 바비큐 파티라도 열어주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애굽의 풍요로운 음식과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평범한 것을 40년 동안 주셨을까요?

만나는 하루가 지나면 썩어 버렸고, 매일 아침 새로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생명이 매일매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게끔 만드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바로 이 원칙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리는 자가 복이 있으며, 그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제 새 부대에 담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광야의 만나 사건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 없이는 살 수 없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율법 아래에서 스스로 배부르다고 여기던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을 때 오히려 영적으로 '주린 자'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반면, 율법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영적인 파산을 고백하며 주려 있던 자들, 즉 "나는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좌절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무능함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고 계십니까?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좌절하는 것은 도덕적인 자기 연민에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열망은, 나의 무능함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다른 분, 곧 구원자를 향한 열망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큰 절망의 늪에 빠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그분의 온전하심 앞에 나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조차 로마서에서 율법 안에서 거룩해지려 노력했지만, 기쁨보다는 끊임없는 자책과 절망에 빠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그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복음을 온전히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해결책을 미래 시제로 제시합니다.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 이 배부름은 내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굶주림과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근거는 우리의 변화나 노력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갈망합니다. 스스로 풍요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풍요로움으로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영적으로 주리고 계십니까? 답답하고 절망의 늪 속에 계십니까? 성경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 가정을 이루고 부모와 자식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갈급하고 주려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세상의 풍요로움과 비교하며 간구하시겠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는 행복했는데, 왜 지금 내 인생, 내 가정은 이렇습니까? 세상의 누구보다 더 풍요롭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 드라마에 나오는 이상적인 배우자 상을 보며 내 남편과 아내를 원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을 볼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 주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기업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망해야 할 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그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그분의 거룩함과 화해를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과 낮아짐을 갈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절망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분의 옷을 입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죄책감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하고 다시 한번 그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마지막 그 날에 누릴 풍요로움을 이 땅에서부터 맛보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이란, 결국 이 땅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를 비웃고 핍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배부른 자는 주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으십시오. 이 약속을 믿는다면, 세상에서 남들보다 뒤처지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내 부족한 아내와 남편, 자식과 부모를 세상의 기준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는 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것은 인간적인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입니다. 믿음은 그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실패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새 부대의 원리를 끊임없이 가르쳐주시며 우리를 숙성시켜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날에 이루어질 기쁨을 오늘 성령 안에서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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