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6장 20-26절 복과 화 (1)

reformedmind 2025. 9. 1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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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 20-26절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지난주에 저희가 예수님께서 12사도를 부르시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 설교를 하신 것이 앞으로 저희가 살펴볼 누가복음 6장 후반부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저희가 읽은 본문에는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3주에서 4주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 화와 복에 대한 내용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어떻게 보면 이 내용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칙을 이해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원칙을 이해해야, 새로운 나라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복 받은 자입니까? 아니면 저주받은 자입니까? 복 받은 자, 그렇죠? 오늘 본문을 이해했을 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좀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복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이 ‘복 받은 자’임을 확신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전제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 받은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화와 저주가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는 자꾸 우리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의해 ‘나에게 저주가 임하지 않을까?’, ‘나에게 화가 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건 인간의 본능 속에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에 근거하여 이제 복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원칙을 좀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12명의 사도를 세우심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12장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인 12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올 것이고, 그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은 그 완성된 모습의 그림자적인 모습입니다. ‘그림자적’이라는 말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속에 놀라운 비밀들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12장로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들이 들어 있었던 것처럼, 지금 예수님께서 새로운 부대에 새로운 원칙을 세워가시는 과정에서 제자들 가운데 12사도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구조물이 세워지고 있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한 가지 원칙을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뭐냐면, 새 포도주는 어디에 담으라고요?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새 포도주’는 누구일까요? ‘새 포도주’라는 비유가 갖는 상징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상징성을 모든 것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평지 설교에는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원칙을 정리하고 가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자, 그러면 이 새 포도주는 누구를 얘기하는 걸까요? 새 포도주가 있다면 헌 포도주도 있다는 거잖아요. 헌 포도주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헌 포도주란 잘 익은 포도주란 말입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헌 포도주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맛이 있다고 했습니다. 맛이 있기 때문에 새 포도주가 싫었고,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제가 이미 헌 포도주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율법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얘기하는 거죠. 자, 그러면 새 포도주는 누구겠습니까? 12사도로 상징되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들을 얘기하겠죠. 즉, 우리를 포함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새 포도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 포도주가 담겨야 할 ‘부대’는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셨으면 좋겠어요. 그 새 부대라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옛 부대보다 더 완전하고 뛰어난 새 부대가 온 거죠. 이 개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목적이 뭘까요? 상식적으로, 새 포도주가 무엇이 되기 위해 부대에 담길까요? 포도즙을 그냥 마시는 거잖아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다는 의미는, 좋은 포도주가 되기 위하여 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이해해야 할 것은, 우리라는 새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부대에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는 ‘복되다’와 ‘화’는 결국 누구에게 얘기하고 있는 걸까요? ‘복되다’라는 것은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겼을 때 일어나는 원리와 원칙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고, ‘화가 있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얘기하면 헌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기려고 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요? 헌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면 터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 다른 말로 화가 있고 저주가 있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오늘 본문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20절과 24절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 저희가 읽은 본문은 복된 자와 화가 있는 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똑같은 잣대로 하나의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거죠. 20절을 볼까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임이요” 여기서 ‘너희’는 누구를 얘기하는 거죠? 앞에서 살폈던 것처럼 새 포도주,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들을 가난한 자라고 얘기합니다.

24절을 볼까요?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죠? 우리일까요? 우리라고 읽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고 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비교하고 싶으신 겁니다. 화 받을 자인 ‘너희’, 즉 헌 포도주를 얘기하는 거겠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그들이 가진 율법 아래에서의 잘못된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부유한 자’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가난한 자, 그리고 부유한 자. 이제 약간 좀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정말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팔복에 보면 이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죠.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그 말이 붙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정말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완벽하게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얘기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가난한 자와 부자로 나누어 버립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우리는 그러한 문화적 영향력 안에서 이 본문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가난한 자를 위하는 입장에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부자 입장에서 이 본문이 부담스러울 때도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큰 틀 안에서 우리가 소외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부분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아주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00% 맞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문화적, 혹은 자본주의적인 관점에 근거해서 이 본문을 좀 더 평등한 사회, 소외된 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각으로 보는 것 자체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는 저희가 좀 다른 눈으로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40편 1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요 지체하지 마소서.” 이게 누구의 시일까요? 다윗의 시입니다. 또 시편 86편 1절에도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합니다. 이것도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다윗이 얘기하는 가난은 사실 물질적인 가난만을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많은 부분, 문자적으로 가난을 표현할 때가 있지만 사실은 그걸 뛰어넘을 때가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가난합니까? 부유합니까? 미국에 사니까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온 인류를 기준으로 보면 여러분은 부유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가난이라는 것은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그런 물질적인 규정, 내가 어떤 계층인가에 대한 규정은 좀 제외하고, 성경이 ‘가난한 자’라고 표현했을 때 그 의미는 마태복음에서 얘기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신앙적 의미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세상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은 무엇입니까? 부자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부자에게는 뭐가 주어진다고요? 화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팔복은 세상의 원칙과 반대되는, 아주 급진적인(radical) 진리입니다. 말도 안 되는 반전이 팔복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복이 부자가 되는 것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부자에게 화가 있대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축복의 근거가 다른 데 있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가 새 부대에 담겨서 좋은 포도주가 될 때 나오는 결과물이 뭘까요?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는 그 결과물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은 무엇을 갖고 있는 것이 복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갖고 있는 것이 복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복 받으셨습니까? 참 어렵죠. 우리는 내가 가진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을 복 받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복이라고 하면 그때부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추상적이고 먼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복이라고 잘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복 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화가 있는 자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새 가죽부대의 원리와 원칙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 나라의 원칙, 헌 부대의 원칙을 한번 살펴볼까요? 헌 부대의 원칙에 가장 큰 기반은 율법이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복이 있을진저’ 이 이야기는 새로운 게 아닙니다. 신명기 27장에 이미 기록된 것입니다. “내 율법을 잘 지키면 너는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복이 있을 것이다.” 그거와 반대되는 것이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네가 누구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하늘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헌 부대의 기초 원리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왜 그렇게 자신감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열정적으로, 열심히 그것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맛있는 포도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깨부수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과 그들이 충돌하기 시작한 거죠. 그들이 가진 원칙을 예수님께서 부정하듯이 선포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는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바알세불에게서 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예수님께 맞섰습니다. 결국 그들이 택한 것은 새 부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이었고, 십자가에서 그들의 소원을 성취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헌 부대의 원리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헌 부대의 원리 안에 있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합니다. 새 부대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새 부대의 원리는 복음의 원리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입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앞으로 하실 일들을 미리 보시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실 미래의 일에 근거하여 지금 복이 있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 미래에 일어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죄값을 지불하시는 사건,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새 부대의 원리는 내가 무언가를 해서 복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셔서, 순종하심으로 고난에 참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건 ‘과연 우리는 그것을 복으로 여기고 있는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네 가지 복만 나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이 ‘가난하다’는 의미가 뭘까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지혜자이고 모든 것을 가졌는데 자기 인생을 보며 헛되고 헛되다고 했을까요? 저는 그들이 겸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가 어떠한 자리에 있는지를 온전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팔복의 표현으로 하면 ‘온유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온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뭔지 아세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땅은 로마의 땅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회복해 주겠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업을 상속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기업,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기업은 무엇입니까? 이 땅의 기업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앞으로 가야 할 가나안 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가나안 땅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얘기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4절을 좀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을 좀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4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 자, 여기서 ‘위로’가 뭘까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인데,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부유한 자가 받는 위로는 이 땅의 것입니다. ‘너는 지금 그걸로 위로받고 있는 거야’라는 뜻입니다.

이걸 아주 좀 냉혹하게 얘기하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사실 고난보다 행복한 걸 좋아하잖아요. “너희 가정이 행복해? 그래, 그걸로 위로받아라. 너 지금 풍요해? 원하는 거 다 살 수 있고 누릴 수 있어? 그래, 그걸로 위로받아라. 너희 자녀가 잘 돼? 건강하고 원하는 대로 다 이루고, 자녀 때문에 자랑스러워? 그래, 그걸로 위로받아라.” 여러분, 이게 뭐가 문제일까요?

만약 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이게 문제가 될까요? 저는 문제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전부니까요. 우리가 이 세상이 끝이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거기서 끝난다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됩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왜 주일에 여기에 있습니까? 빨리 나가서 즐기고 하고 싶은 거 해야죠. 그게 정답 아닐까요? 이 세상이 전부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새 부대는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은 여기가 전부라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전부니까, 여기서 남을 짓밟아서라도 존경받아야 하고, 잘 돼야 이 세상에서 잘 산 것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내 건강을 위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즉 새 부대에는 다른 원칙이 적용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땅이 여러분에게 기업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 땅의 눈이 아니라 하늘의 눈으로 땅을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사십니까? 왜 이렇게 열심히 사십니까? 우리 인생이란 것이 나이가 많든 적든, 어차피 생물학적으로 숨이 멎을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사십니까? 제가 두 달간 안식월을 보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돌아가서 열심히 목회해야겠다’ 이걸 느꼈을까요? 아니요, ‘이렇게 살면 참 좋겠다’는 걸 느꼈습니다. 내 마음대로, 스트레스 하나 안 받고, 두 달 동안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것만큼 인생이 좋은 게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솔로몬이 인생이 헛되다고 하면서 인간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 하나를 줍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극단적으로 즐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생물학적으로 끝난다면, 내가 욕망하고 열망하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죠. 세상에서 최고가 되려 노력하든, 아니면 편안하게 쉬고 즐기는 것을 열망하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과 원칙을 제공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한 패러다임과 원칙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남은 인생을 많은 경우 세상의 잣대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새 부대에 담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헌 부대의 원칙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세상이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나를 희생하고 닦달하는 것을 즐기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모습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먼 미래에 올 천국은 아픔도, 문제도, 배고픔도 없는 곳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걸까요? 그 생각의 근원은 어쩌면 우리가 아직도 헌 부대 안에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결핍이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 되심이 드러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결국, 다른 원칙이 주어진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가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자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즉 가난해야 하나님 나라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기 때문에, (세상적인 관점에서)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은 부유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수단과 목적으로 삼아 세상의 것들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세상 나라, 헌 부대에 있는 것입니다.

새 부대가 된다는 것은 헌 부대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건물을 올바로 짓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존 건물을 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내 생각과 내 사고를 다 무너뜨리고 새로운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운 땅을 파고, 새로운 반석 위에 우리의 집을 건설해야 합니다. 새 부대라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세상적인 상식, 노하우, 경험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경험과 지식, 섭리로 나를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난해지는 겁니다. 내가 가진 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난해지고, 내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상의 것들로 부유한 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했으니까요.

제가 아버님께 가장 듣기 싫었던 얘기가 있었습니다. 항상 전화하시면 “목회 잘해라”라고 하신 다음에, “너네 몇 명 모여? 아직도 그래?”라고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의 마음 안에는 자식이 목회에서 성공하기를 원하시는 마음이 있었겠죠. 그런데 아들로서는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얘기가 나오면 신경이 곤두서고 빨리 전화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통화를 하는데, 그냥 “목회 잘해라” 하고 끝나시더라고요. 감정적으로 뭔가 미묘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성적으로 땅의 원칙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늘의 것들로 변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것들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것들은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맛보고 경험하고 만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의 것들을 만져보고 생경하게 여기고 계십니까?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전혀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경하다’는 것은 나와 부딪힌다는 겁니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마태복음의 표현대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해석을 빌리자면 ‘내가 영적인 파산자’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데, 그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생경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유하라고 하는데, 내 모습이 온유하지 못함을 통해 애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부유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가난한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하냐 가난하냐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한 자임을 여러분이 고백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낯설고 생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색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생각으로 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작은 눈과 마음과 뇌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들을 주관하실 때마다 ‘이것이 참 이상하다, 낯설다’라고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일이 우리 안에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발견하며 그 순간순간 익어가는 새 포도주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 포도주의 인생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익어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런 과정에 있다면, 내 아내도, 내 원수도, 내 남편도, 내 자식도, 내 부모도 익어가는 것들을 목격하며, 그것이 불평불만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찬양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그리고 이 공동체에 그 즐거움과 영광을 목격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확신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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