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6장 12-19절 열두 사도

reformedmind 2025. 9. 10.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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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장 12-19절
12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에수를 파는 자 될 가롯유다라 17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요즘 한국에서 '건국절' 이슈 때문에 말이 참 많습니다. 그 이슈와 함께 나오는 이야기가 "일제 치하에서 한국 사람은 한국인이었을까, 일본인이었을까?"라는 논쟁입니다. 여러분은 그 당시에 사셨던 분들이 정말 한국 사람이었을까요, 일본 사람이었을까요? 우리는 당연히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권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든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이러한 논리가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미국 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까? 참 잘 생각해 보십시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미국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은 애매해지기 시작합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한국 사람이라고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는 단순히 법적인 이슈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고 하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국가를 이야기할 때 근거가 되는 것은 영토와 주권입니다. 우리의 주권자가 누구이며, 우리의 영토가 어디에 있는가를 따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고 했을 때, 눈에 보이는 영토나 주권을 갖고 있습니까?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은 미국의 주권 아래 미국의 영토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천국 시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믿는 자들은 우리가 가진 한국이나 미국의 시민권보다 천국 시민권에 더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본문이 갖는 구조적인 중요성을 저희가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을 대라는 문제는 퀴즈 대회에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열두 사도의 이름을 다 외우지 않으셔도, 모르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새로운 나라를 규정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저희가 몇 주 전부터 다루고 있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터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 새로운 시스템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많은 제자 중에서 특별히 열두 명을 세워 '사도'로 칭하신 것은, 이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부대, 새로운 나라의 기둥을 세우는 일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이 구절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단어가 중요하겠지만, '기도하러'라는 말이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왜 기도를 하는데 굳이 산으로 가야 할까요? 산에서만 기도해야 할까요? 사실 성경에서 '산'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가 오늘 본문을 출애굽기의 한 사건, 바로 시내산 사건과 비교하기를 원합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앞에 모이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 위로 올라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이 그 모습과 교차되는 것을 발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이 사건이 시내산 사건과 연관이 있냐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국가가 형성된 것은 사실상 모세를 통해서였고, 그 시작점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고 성막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칙들을 선포하시려고 합니다. 다음 주부터 보게 될 평지 설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 선포되기 전에, 먼저 나라의 구조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 중에 열두 사람을 세워 사도로 칭하시는 일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에베소서 2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나라, 새로운 부대의 토대는 결국 '사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는 계속 이어지는 직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사도' 운동을 통해 자신이 사도라고 주장하며 기적과 예언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 분들이 있지만, 이는 비성경적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사도는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부대를 보여주기 위한 일회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도가 될 수 있는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열두 사도들의 면면을 보면,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결코 괜찮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부, 세리 등 사회적으로 명망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예수를 팔 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굉장히 불안전해 보입니다. 우리가 자꾸 사람에게 집중하면 그 불안전함에 함몰되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신사도 운동은 결국 사람과 그가 행하는 능력(power)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하는 지점은 항상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다른 권력을 바라볼 때였습니다. 목사든, 건물이든, 교회의 어떤 특성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새로운 부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이 증거될 것입니다. 새 부대는 옛 부대, 즉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바로 그 사도들의 가르침, 믿음, 고백이라는 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아니어도 사도처럼, 제자 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를 통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아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신사도 운동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사도들이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모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놀라워하며 모였지만,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는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부대, 즉 교회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찾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우리의 안타까움과 결핍을 아뢰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연약함, 물질의 궁핍함, 가정과 관계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간구하고 때를 쓰는 것은 자녀로서 당연한 권리입니다. 자녀 중에 가장 얄미운 아이는 잘난 척하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아이입니다. 오히려 와서 이야기하고 때 쓰고 부탁하면, 마음은 아파도 '역시 내 자식이구나' 싶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때를 쓰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들 됨'을 어떻게 확인하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쁨 때문이 아니라, 내 문제가 해결되고 배고픔이 채워지고 내 병이 나은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 병을 고쳐주는 의사 친구의 아버지를, 내 빚을 탕감해주는 부자 친구의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오해하고 그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의 문제가 해결되어서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헌 부대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부대에 담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의 터 위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결국 사도들의 신앙고백과 순종,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버리게 한 근거,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새 부대에 담긴다는 것은, 포도즙이 부대 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맛있는 포도주로 익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경험해 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맛있는 포도주의 맛을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하늘의 비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정말 드물게, 사도 바울과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기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놀라운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 부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하루하루는 매우 소중합니다. 그 하루만큼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좋은 포도주로 익어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돌아보며 의미 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내 인생은 달라져 보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고통스러운 사건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 사건을 통해 내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과의 관계가 풍성해졌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 시간은 더 이상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시간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 부대의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실패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헌 부대 안에서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목숨을 끊었지만, 베드로는 그 실패 속에서 자신을 만나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실패의 경험이 오히려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왜요? 새 부대 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세상의 눈, 실패자의 눈으로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눈으로, 새 부대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고 규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새로운 부대 안에 담겨진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속한 가정도 새로운 나라의 원리와 은혜가 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새로운 관계성, 새로운 삶의 의미를 써 내려가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나의 부모, 나의 자녀,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이 바로 우리의 노트인 것 같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그 노트가 버겁고, 쓰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노트에 모든 것을 쓰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쓴 노트를 보면 답답하고 절망스러울 때가 많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부대 안에서 하나님이 쓰신 노트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노트를 숨기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마다, 생각하는 지점마다 펼쳐 놓으셨는데, 우리는 지독하게도 그것을 피해서 갑니다. 하나님이 펼쳐주신 그 노트를 읽고, 우리 자신을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안으로 이끌어 가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이 놀랍게 변화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작점(tipping point)은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눈에 내 아내가, 내 자식이, 내 부모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신 노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내 남편, 내 자녀, 내 부모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전환점(turning point)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열두 사도의 이름을 외울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도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열두 사도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보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 승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도들이 증거했던 그 내용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소망입니다.

헌 부대는 이미 찢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부대 안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새로운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우리의 가정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 자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가정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교회가 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변하고 내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내 가정이 변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도, 여러분의 사업체도 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거기서부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쫓아왔지만, 그들이 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병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내 존재가 변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의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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