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5장 17-26절 어느 것이 쉽겠느냐

reformedmind 2025. 9. 6. 14:19
반응형

 

누가복음 5장 17-26절
17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그렇죠?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화되어서 그것을 들어준다는 뜻으로 저희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볼 때, 우리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그 단어를 상당히 잘못 오해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교회는 이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에 되게 많이 꽂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심지어 "하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라는 말까지 나오고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열심,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서 우리의 것들을 들어주실 거라는 생각을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능적인 종교심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신에 대한 개념을 가진 어느 종교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의 열심이 병을 낫게 하는 거죠? 바로 친구들의 열심이 병을 낫게 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렇게 삐딱하게 이야기하냐면, 여러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지극한 정성으로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셨나요? 여러분, 그냥 대충 "하나님, 해주시려면 해주시고 말려면 마세요"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오셨어요? 아니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말 내 인생, 내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얼마만큼 들어주셨어요? 한 10%는 들어주셨나요?

어떤 분은 자랑스럽게 "하나님은 내가 기도할 때마다 다 들어주신다"고 말하는 분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제 인생에서는 그런 일들이 잘 벌어지지 않더라고요. 제가 목회하면서 성도들의 삶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이분의 기도는 좀 들어주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는 기도도 있지만, 오해하지 않고 들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목회하다 보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 내 모든 것을 떼어줘서라도 저 기도를 하나님 들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겉으로 보면 안 들어주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종종'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는 안 들어주시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그때 우리가 듣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조금 더 기도해야 해",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해", "뭔가 당신이 부족해서 그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조금 더 열심히 해봐"라는 이야기를 알게 모르게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그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좀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오늘 본문은 우리가 많이 아는 이야기입니다.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 중풍병자는 병이 낫기 전까지는 침묵할 수밖에 없어요. 왜요? 중풍병자니까요. 아마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말을 하더라도 자기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의도적으로 이 사건 속에서 무능력한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누구의 열심으로요? 친구들의 열심으로요. 친구인지 가족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사람들의 열심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놀라운 기적들을 베푸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이 퍼져서 많은 사람이 몰려왔고, 병 고침을 받고자 이 친구들도 예수님을 찾아온 거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갈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장애물이죠. 마음은 있었지만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노력해야죠. 그 노력의 끝이 뭐냐면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침상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삐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집주인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죠? 친구들은 그렇다 쳐도, 성경을 보면 이 기적이 일어났으니 좋은 일이지만, 그 집주인은 재산이 파손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 일이 나에게 불편함이 되면 크게 불평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렇지만 오늘 성경은 거기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그 집주인의 불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 기적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습니다. 하여튼, 우리가 봤을 때는 친구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들의 열심과 지혜로 말미암아 침상이 내려갑니다.

그때 예수님의 반응이,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느냐"고 꾸짖으셨으면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안 하겠죠.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일을 이야기합니다.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무조건 "아멘"으로 받지만, 이건 사실 굉장히 이상한 거예요. 병 고치러 왔는데 병을 낫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신 거죠. 말이 안 되는 반응을 하고 계신 겁니다. 더 재밌는 건 뭐냐면, 그 앞에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무엇을 보셨다고요?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셨나요? 아니요, 누구의 믿음을 보셨죠? 친구들, 그 침상을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누구의 죄를 사해주신 겁니까? 친구들의 죄가 아니라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는 거예요. 이게 이해하기가 쉽나요? 이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잖아요.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 친구들의 믿음을 칭찬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결국 그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진 겁니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전제 조건, 우리의 신앙에 대한 어떤 잘못된 관점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여기에 꽂힐 수밖에 없어요. '아, 중풍병자가 나았구나. 그런데 그게 친구들의 지극한 정성을 통해 이루어졌구나' 하고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을 누가는 은연중에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사방 각지에서 몰려들고 있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병 고치는 기적을 통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계셨습니다. 병 고침을 받고자 온 사람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이 사람의 가르침이 맞나 틀리나를 보려고 집중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제기되었던 질문이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 말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던 것도, 이사야의 본문을 가지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네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네가 무슨 권위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느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1장부터 설명해왔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예수님의 탄생부터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시는 것까지, 그 결론은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네가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죄 사함의 권위와 병 고침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데, 바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병 고침에 관심이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논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다른 데를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은 이건데, 우리는 우리 생각에 꽂혀서 자꾸 나무만 보고 있습니다. 뭘 봐야 합니까? 숲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 지금 이 당시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큰 숲을 봐야 올바른 우리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은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겁니다. 왜요? 우리가 지극한 정성을 다해 간구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근거하여 들어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오늘 본문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자,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와서 예수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뭘 잘못하는지 지적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딱 레이더에 걸렸습니다. 갑자기 지붕에서 기왓장이 떨어지고 뜬금없이 침상 하나가 내려오니, 모든 사람이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병을 고쳐주겠다"가 아니라, 갑자기 "네 죄가 사해졌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아하!' 하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것은 정답입니다. 죄 사함의 권한은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요즘 계속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 안식월에 리전트 칼리지에서 베드로전서 수업을 들으면서 제 마음속에 계속 떠올랐던 질문 중 하나는, '올바른 것, 정답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정답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정답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에는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해주고 싶은 우선순위가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신학적 정의감 때문에 서신서가 가진 본래 의도를 놓쳐버릴 수 있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런데 뭘 몰랐던 겁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었기에, 이런 잘못된 말을 들었을 때 신성모독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율법학자로서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아주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정답에만 꽂혀서, 그 정답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답답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이 공동체에 무엇을 원하시는가, 회복을 원하시는가, 정죄를 원하시는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판단과 비판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때는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시는 것은 남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 남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회복을 위해 애쓸 것인가 하는 고민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2절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느냐."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질문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어느 것이 쉬울까요?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이 쉬울까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쉬울까요?

제가 볼 때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들의 신앙의 근거로 볼 때, 당연히 '죄 사함'이 더 가치 있고 어려운 것이었을 겁니다. 왜요? 그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까요. 병 고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그 외의 다른 현상적인 일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물으시면서, 그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즉 눈으로 보여줘야 하는 '일어나 걸으라'는 것을 행해버리신다는 점입니다.

이 뉘앙스는 사실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꼬집고 계신 겁니다. 그들은 죄 사함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판단의 기준이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그들은 거기에 가치를 두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그 일을 믿고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답과 진리를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원칙대로 살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비판입니다. 이걸 제일 잘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사는 늘 강단에서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실질적인 삶 속에서는 그렇게 못하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그것이 저에게 늘 갈등이 되고, 죄책감으로 다가옵니다. 그 죄책감 때문에 '내가 과연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나?'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만 그렇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좀 잘해보려고 할 때마다 그런 고민이 듭니다. 신실하게 고민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책감이 우리를 늘 짓누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 같습니다. 가르치는 것과 사는 것이 따로 노는 거죠.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조항들을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확인하는 일을 했습니다. 안식일에 몇 걸음 이상 걸었나 안 걸었나, 물건을 들었나 안 들었나 체크하는 식으로요. 그것을 안 했으면 나는 안식을 잘 지킨 것이고,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을 정죄할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요?

믿음을 행위로 규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리스트를 정하고 그것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를 따집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들의 생각에는 '일어나 걸으라'가 더 어렵습니다. 왜요? 보여줘야 하니까요. 증명되어야 하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죄 사함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쉬운 것으로 여겨버린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즉 중풍병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두가 놀랍니다. 무엇 때문에 놀라죠?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중풍병자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이 쉬우세요? 무엇이 어려우세요? 여러분의 신앙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내가 변화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쉽게 여기세요? 아니면 내가 이것저것 지키는 것을 더 쉽게 여기세요? 왜냐하면 관계는 잘 보이지 않으니까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나만 아는 것이니까, 얼마든지 숨기고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도전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을 정말 그대로 고백하고 실행하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고민해야 할 지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단순히 신앙의 행동 잣대로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정말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을 정말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정말 이 공동체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큰 틀로 돌아와서, 우리의 관심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지적했던 신성 모독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가야 합니다. "너희들이 말로는 쉽다고 생각하는 죄 사함, 그런데 너희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 내가 해줄게." 그 어려운 것을 하면, 쉬운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 되잖아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그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을 행하시는 겁니다.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 기적이 일어나면, 그들의 죄 사함이 증명되는 겁니다.

자, 이 일을 하셨을 때, 아까 우리가 마음이 좀 걸린다고 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친구들의 열심으로 친구들이 아닌 다른 사람, 중풍병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는 것 아닌가?' 심지어 이것을 구원과 연결하려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행동과 결과의 연결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내가 행동하고 결과가 나옵니다. 지극한 정성을 다했으니 나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은 누가 한 겁니까? 친구들이 한 겁니다. 그럼 중풍병자는 무엇을 했나요? 솔직히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냥 무력하게 누워 있었을 뿐입니다. 그 무력함을 주위 사람들이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열심을 냈던 거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난 시스템은 '행동과 결과'가 아니라, '결과가 먼저 있고 행동이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24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즉 치유가 선포된 겁니다. 그리고 나서 행동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늘 헷갈리시죠? 성경은 우리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고민하냐면, 내가 의인처럼 행동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결론이 먼저 주어진 겁니다. 그 결론 때문에 우리의 행동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과 똑같습니다. 중풍병자가 병이 나았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니까, 그 다음에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서 집에 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우리가 무능력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말씀드렸듯이, 회복이란 내가 회복되어야 할 존재임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움을 깨달아야,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무능력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남은 목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동안에는 공동체와 한국 교회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연약함만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놓칠 때가 많습니다. 종말론이란 결국 하나님이 오실 그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국이 좋아야 천국에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그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배가 바로 그러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성령을 통해 깨닫는 거죠. 우리에게는 친구가 있습니다. 아주 신실한 친구,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우리가 그것을 갈망하도록 도우십니다.

이 공동체가 살아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 나는 무능력하구나. 내 힘으로는 이룰 수 없구나'를 깨닫고 자꾸 성령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성령을 의지한다는 건 결국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지극한 정성이 들어가는 겁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성령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지극한 정성을 다해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에게 친구 되시는 성령께서 계시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무능한 나는 자꾸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저는 안식월 두 달 동안 제가 새로운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내린 결론은, '인간은 안 변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본성은 거기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더라고요. 인간은 안 변합니다. 중요한 건, 그 안 변하는 것조차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어느 순간 놀라운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내 지극히 연약한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회복을 갈망하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가운데 그런 일들이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뭘 바라봐야 하냐면, 결국 내가 깨닫기 전까지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지붕을 열 수 없고, 이 침상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그 중풍병자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친구들이 지붕으로 올라갈 때, 또 사람들이 많아 들어가지 못할 때 얼마나 낙심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성령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일어나 걷기 전까지 계속 그러한 고민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어난 분들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가고 있는 도중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다. 순종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중풍병자의 행동이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딱 하나가 추가된 것이 있습니다. 24절에 예수님은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그 사람은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 사이에 무엇을 넣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니까 진정한 순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와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서 5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 성도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집에 간 다음에 어떤 일을 했을까 상상해봤습니다. 그냥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오늘 본문의 결과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저는 그가 자신과 같았던 사람들을 위해 침상을 메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낮아지셨던 것처럼, 고난을 통해 회복된 자들은 다른 사람의 고난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족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때로는 "이게 무슨 선물이냐"고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너무 힘들면 그것이 선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족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회복의 의무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내 자녀를 위해 침상을 들어 메는 신성한 의무, 내 부모를 위하여 침상을 메어야 하는 의무를 주셨습니다. 침상을 멘다는 건 함께 울고 함께 고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강의를 들으면서, 교수님이 '새로운 시작인 교회를 가족이라는 표현으로 썼다'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꽂혔습니다. 이제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는 거죠. 결국 이 **하사나교회** 공동체는 하나의 가족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가족도 노력이 필요한데, 이 새로운 가족은 더 그렇겠죠.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 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사나교회** 공동체 안에 그러한 열망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조금 더 내 가족들을 위해서 침상을 메는 일을 해봐야지.' 그것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한번 메어봐야지. 그래서 이 메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움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을 풍성히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경험된다면, 우리 가운데 회복이 일어날 겁니다.

여러분, 회복이라는 건 갑자기 폐허가 허물어지고 아름다운 건물이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은 리모델링과 같습니다. 리모델링이 쉽나요? 아무리 잘해도 새집보다 좋을 수 없고, 또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땅에서의 회복이란, 늘 어려워졌다가 다시 좋아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평생 해 오셨습니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자식을 위해, 부모를 위해, 아내와 남편을 위해 끊임없이 해 오셨습니다. 그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영광을 즐거워하며 계속 지속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은 누가 도와주신다고요?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힘드십니까? 자녀 때문에, 남편과 아내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힘드십니까? 여러분이 나아가 애통하며 간구해야 할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이 부분들을 이기게 해달라고 나아가셔야 합니다.

이제 제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 가정의 일들을 교회 공동체의 영역으로 확장해 주시면 좋겠어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처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람에게 임했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찬양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정말 말도 안 되게 연약한 모습을 보고 답답해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 답답함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어서,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주고,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겨주면서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이 공동체가 된다면, 우리 가운데 작지만 놀라운 회복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 조그만 회복이 내 인생을 정말 말도 안 되게 변화시킬 겁니다. 여러분, 그것이 누구의 고백이냐면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지금 2천 년 역사를 통해 이어진 참된 교회의 고백입니다. 그 고백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