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누가복음

누가복음 4장 31-44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reformedmind 2025. 9. 5. 14:15
반응형

누가복음 4장 31-44절
31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33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 한지라 36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38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라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40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보여지는 현상에만 관심을 가져요. 그러다 보면 계속 우리에게 뭘 보여달라고 얘기해요. "하나님, 보여주세요. 우리에게 증표를 주세요." 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요. 사실 성경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항상 예수님께 요구했었던 것이 뭐냐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에 직접적으로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으세요. 참 재밌죠.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도 동일한 이야기래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라.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달라." 고 요구를 해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그 요구에 말씀으로 이겨내시는 것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요. 무슨 말씀이냐면요,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들을 찾아내야 된다는 거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이 장면이 전환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장면이 전환되기 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죠?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해요. 그래서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유유히 거기에서부터,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오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오세요.

그런데 우리가 지난주에 읽었던 성경을 기억하면, 이 나사렛 사람들이 요구했었던 것이 뭐였죠? 가버나움에서 베풀었던 기적처럼 우리에게도 그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사렛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를 알고 있었어요. 그가 요셉의 아들인 줄 알고 있었어요.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베풀고 놀라운 일들을 펼치고 있다고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이게 진짜인가?'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요구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얘기하셨던 내용들은 뭐예요? 내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메시아이심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사렛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거죠. 보여달라는 기적은 안 보여주고, 그가 스스로 메시아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그 예수를 죽이고자 했어요. 왜요? 그들이 생각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자, 이제 가버나움에 왔는데 너무 재밌는 것이 뭐냐면요, 누가는 이렇게 얘기해요.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나사렛 사람들과 가버나움 사람들이 다른 점이 바로 이거예요.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는데, 가버나움 사람들은 어떻게 했어요? 그 말씀의 권위에 놀라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사실 33절의 한 단어에 눈이 집중되었어요. 뭐냐면,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라고 얘기하며 지금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앞에 '회당'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저는 누가가 의도적으로 이 두 회당 사건을 비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본문에는 가버나움 회당을 얘기하고 있지만,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봤을 때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건이 있었잖아요. 똑같은 '회당'을 얘기하고 있어요. 한 회당에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거했어요. 이제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귀신 들린 자가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는 고백을 해요. 너무 재밌지 않으세요?

회당이라는 장소적 개념을 저희가 좀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회당이 어떤 곳일까요? 이 회당이라는 것은 사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이스라엘 민족에게 되게 중요한 장소적 개념이 있어요. 이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회당은 기도하는 곳이 되었고,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이 그들 종교의 중심이지만, 그 중심적인 역할을 또 하는 곳이 바로 회당이었단 말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성전에 가기 어려우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회당이었어요. 지금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교회예요. 교회 공동체. 동네 교회 공동체가 회당의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이 회당이라는 장소적 개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번 자세히 보세요. 어떤 일들이 일어나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메시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들이 나사렛 회당에서 나타났어요. 이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죠?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회당 안에 있는 거예요. 이게 이해가 되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공동체,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보여지고, 기도하는 곳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잖아요. 2000년 전에도 똑같이 회당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너무너무 중요한 장소적 개념을 갖고 있었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현실은 어떤 거냐면, 바로 그곳이 '음녀의 소굴'이 되어버린 거예요.

재미있는 것은, 잠언서에서 표현되었을 때 음녀가 있는 곳은 '산당'이라는 곳이라고 얘기해요. 잠언서에서의 비교 대상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산당이에요. 솔로몬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힘이 있어서 명예를 얻고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있었지만, 영토를 확장하고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외국의 공주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돼요. 정략결혼을 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되냐면, 그들의 신들이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와요. 산당이라는 곳은 그들의 신들을 섬겼었던, 그곳에서 제사 드리고 예배드렸었던 곳이란 말이에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 산당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항상 종교 개혁이 일어났을 때 그 산당을 제거하라고 요구하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뭐냐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면서 항상 비판하고 경계심을 비추신 곳은 산당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었고 회당이었어요. 왜 그럴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적용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들이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가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장소적 개념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더러운 귀신이 있는 곳이 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곳이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 2000년 전에도 그것이 문제였고,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교회들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지 않은가.

여러분, 교회에 오실 때 어떤 마음으로 오세요?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준비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오늘 설교를 통해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지금 무엇 때문에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있고, 무엇 때문에 이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만약 우리가 "내가 평생 그리스도인이었으니까, 내가 평생 매주 예배드렸으니까 당연히 예배드려야지." 하고 나온다면, 어쩌면 2000년 전의 나사렛 회당과 가버나움 회당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집사여서, 내가 장로여서, 내가 목사여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2000년 전 회당이 갖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잣대로 성도를 규정하고 교회를 보고 있지 않을까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면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요. 가버나움 회당에서도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쳤을 때 센세이션을 일으키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때 병든 자들이 나아왔을 때 하는 고백들을 오늘 본문에서 설명해요. 일단 귀신 들린 자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얘기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라는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 몰려와서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했던 고백이 뭔지 아세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얘기해요. 여러분, 이건 뭐죠?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는 거예요.

성경은, 지금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장치를 갖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시는 것,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증명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푸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요. 그리고 사탄도, 마귀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을 저희가 볼 수 있어요.

네,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탄도 그걸 아는데 우리는 많은 경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것 자체로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다인 것처럼, 그것이 나의 구원의 증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겁니다. 왜요? 마귀도 고백하니까요. 여러분, 마귀가 천국 가나요? 사탄이 천국 가나요? 아니에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걸 아느냐 모르느냐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럼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느냐'예요. 지금 마귀와 귀신 들린 자는 뭘 하고 있냐면 이렇게 얘기해요. 예수님이 오셔서 그 말씀을 듣자 34절에 이렇게 얘기해요.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마귀가 얘기하고 있는 것이 뭐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상관이 있다고 지금 이 귀신 들린 자와 접촉하고 계시는 거거든요. 무슨 말인가요? 마귀는 예수님과 상관없기를 원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요구했던 게 뭐죠? "나와 상관없게 해 줘. 그러면 내가 네가 원하는 거 다 이루게 해 줄게." 이것이 근본적인 요구사항이었어요.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 그러면 나에게 절해. 그러면 내가 이 모든 권위를 줄게. 지금 너의 근본적인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된 너의 파워를 한번 써봐." 이런 식으로 얘기해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자꾸 변화시켜버리는 거예요. 그 의미를 변화시키면 자기와 상관없게 돼버리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상관있다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는 거예요.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마귀와 상관이 있죠? 왜 마귀를 여기서 내쫓는 것이 귀신 들린 자에게는 구원이 임한 것이죠? 바로 저희가 계속 얘기했던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가 드러나는 그곳에 근거가 있어요.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가 드러났던 곳, 소위 말하는 원시복음이 어디에 있죠? 창세기 3장 15절에 있어요.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박살 내게 만드는 그 사건", 바로 그 사건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잖아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에 관계가 변화됐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을 때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그런 관계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무너지고 끊어지고 누구와의 관계가 만들어졌죠? 마귀와의 관계, 사탄과의 관계가 됐어요.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가 돼버린 거예요. 사탄이 된 거예요. 그럼 예수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 뭐죠? 그 관계를 무너뜨리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많이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시느냐 하면, 결국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거예요. 귀신을 쫓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앞으로 하실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귀신을 쫓는 행위의 근본적인 완성은 어디에서 일어나죠?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마귀와 사탄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는 겁니다. 이제 그 관계가 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졌을 때, 이제 더 이상 어떤 누구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어떤 관계 속에 있습니까? 여러분, 아직도 사탄과 그런 관계 속에 있습니까? 아직도 세상의 다스림 안에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지점이 여기라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내가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 내가 오늘 예배드렸으면 나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제가 무섭고 두려운 이유는, 지금 이런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난다고요? 회당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회당 안에 있다고 만족할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죠? 이 땅에 오셔서 결국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결국 하나님에게 있었던 그 가지가 잘려 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거죠?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읽고 있었지만, 거기서 기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떠세요? 과연 2000년 전의 일만 그럴까요? 지금 우리는 어떨까요? 내가 지금 매주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여러분 만족해 하세요? 내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고, 어떤 헌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만족해 하세요? 근데 만약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동의하지 않는 하나님의 요구가 오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되죠? 내가 하나님을 거부하게 되는 거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몰고 가면 그때 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들을 반복하게 되는 거죠. 심지어 어떻게 해요? 예수님을 죽이고자 낭떠러지로 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회개가 요구되고 있다는 거예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회개와 구원의 기쁨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거죠? 건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걸까요, 병자에게 주어지는 걸까요? 복음서에서 누가 회개하죠? 바리새인이 회개하나요? 사두개인이 회개하나요? 서기관들이 회개하나요? 아니면 세리들이 회개하나요? 창녀가 회개하나요? 나병 환자가, 병든 자가, 귀신 들린 자가 회개하나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종교적인 열심으로 회당에 모여서 스스로 거룩하고, 무엇인가 이루고 있고, 정말 하나님을 위해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회개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가 없어요. 저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의롭다 하고,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신앙의 연륜, 우리가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루었다는 것들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교회 공동체가 회개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고, 나의 못남을 회개하고, 나의 작은 죄까지도 회개하는 공동체. 큰 죄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소한 거짓말, 나의 사소한 욕심, 나의 사소한 질투, 다른 사람이 뭐라고 안 해도 될 만한 자랑거리들조차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왜 그러냐면, 그런 고백들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기 때문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구원이 다시 재생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어요.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 구원의 기쁨을 매 순간 경험하는 거예요. 우리는 연약해서 수도 없이 근심하고 의심한단 말이에요.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얘기할 때마다 늘 내가 지나온 일들 때문에 고민하고 '내가 정말 구원받았는가?'라는 생각들을 하지 말자, 하지 말자 하면서도 늘 하게 돼요. 저는 거기서 벗어나서, 오히려 내가 조그만 것조차도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아, 이런 연약한 나를 구원하셨구나!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시라는 거예요. 우리가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어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는 거예요. 사소한 절망 속에서, 사소한 무능 속에서도 그러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시몬의 장모가 병 낫는 것,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병 나았을 때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거기에 구원이 임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미 구원이 주어졌어요. 그렇잖아요. 병이 나아서 구원받았나요? 아니요, 그렇지 않잖아요. 이 본문을 읽는 저희는, 성경의 사건을 통해서 그 놀라운 복음의 사역사가 이방인인 우리들에게도 일어났어요. 이미 우리는 포로 되었는데 자유함을 경험한 자예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을 주는지 하나님 앞에 고백한 자예요.

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모이는 이 교회를 가버나움의 회당처럼, 나사렛 회당처럼 만들고 있는 우리를 보게 된다는 거죠.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보다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진리,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열심으로 그 교회를 세우려고 하고 있다는 거예요. 율법은 있는데 은혜가 없는 곳으로, 회개는 없는 자기 의만 드러나는 곳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저도 회개할 부분이 있는 거고, 여러분들도 회개할 부분이 있는 거죠. 과연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가정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저는 교회의 가장 작은 단위가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가정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그곳에 있다고 저는 믿어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구원의 기쁨이 드러나는 곳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를, 용서하심을 경험했다면 여러분의 아내를, 남편을 용서할 수 있고 여러분의 자녀를 용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그것이 안 된다면... 제가 참 인생을 살아가면서... 저는 잘할 줄 알았어요. 여러분이 "설마"라고 여길 수 있지만, 저는 결혼한 다음에 잘할 줄 알았어요. 저는 결혼하고 나서 아내를 정말 사랑하고 잘 섬길 줄 알았어요. 저는 제 자녀들을 성경적으로 잘 키울 줄 알았어요. 제가 청년들에게 결혼 상담을 해줄 때도,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한테 얘기할 때도 저는 잘할 줄 알고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근데 돌아보니까 그렇지 못하더라고요. 오히려 제 자녀들에게는 더 율법적으로 "이거 지켜, 지켜, 지켜." 라고 요구하고, 용서를 얘기하기보다는 세상이 생각하는 기준을 요구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들을 자꾸 요구하는, 그러한 너무나 전형적인 목사가 되어버리는 저의 모습을 발견해요.

여러분, 이게 가정에서만 그렇겠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겠죠. 저도 되게 멋있고 유능하고 정말 대단한 목사가 되고 싶은데, 제가 하고 있는 것이 그렇지 않다고 여러분이 충분히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이 저희의 현실이에요.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거기에서 절망하고 "나는 안 되나 봐." 그리고 막 살아 버릴까요? 아니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뭘까요? 그냥 회개하는 거예요. 나의 못남을 회개하고, 나의 연약함을 회개하고. 그런데 너무나 기쁘고 소중한 진리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셨다는 거예요. 나의 부족함을,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거예요. 중요한 건 뭐냐면, 그 용서함을 우리가 아직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우리는 자꾸 "그래도 양심이 있죠. 제가 노력한 다음에 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게요." 라고 하니까 기쁨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발짝도 못 가고 있는 거예요. 왜요? 내가 지금 내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아직도 영적 침체에 있고, 아직도 내 교만함에 있고, 아직도 내가 뭔가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까 내가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를,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고 있는 전략인 거 아십니까?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거부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귀신들의 전략이에요.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 사탄의 전략에서 멀어지는 여러분, 이겨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그냥 받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이에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얘기하셨어요. 하나님만큼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 누가 있겠어요? 여러분의 아내도, 여러분의 자식도 여러분의 연약함을 완전히 알지 못해요. 오직 하나님은 아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얘기하시죠? 너를 용서하셨다고 얘기해요. 다른 말로, 오늘 본문으로 얘기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귀신의 다스림을 축출하셨다는 거예요.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은 귀신이요, 마귀요, 세상이 아니라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양심 때문에 자꾸 귀신에게 가고 있는 거예요. 말 자체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건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그냥 받으세요. 조건을 달지 마시고요. 이미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거 그대로 받으시고, 우리가 해야 할 건 뭐냐면 기쁨이에요. 즐거움이에요. 감사해요. 용서함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을 여러분의 가정에서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버나움 사람들이 그 기적이 너무 좋으니까 우리를 떠나지 말라고 얘기했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뭘 하신 거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것이 기쁨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쁨은 나누는 거예요. 과연 여러분 무엇을 나누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나눔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 나눔은요, 제가 보니까 연습하셔야 해요. 이 연습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시작이 돼요. 여러분의 연약함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나누셔야 해요. 아버지로서 나의 연약함을 용서하시고 나에게 또 다른 용기와 열심과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내 아내와 나누어야 해요. 자식들과 나누셔야 해요. 마찬가지로 아내들도 자신을 용서하시는 그 하나님의 기쁨을 나누고 있어야 해요. 만약 우리 가정 속에서 그것을 나누게 된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눌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눌 수 있다면 여러분이 이웃들에게, 세상에서 나눌 수 있어요. 왜 우리가 전도를 못 하느냐, 왜 세상에서 말을 못 하느냐. 내가 집에서 나누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아내와 내 자식들과 나누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나누지 못하는 거예요. 밖에 나가서도 나누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시는 게 뭐냐면, 예수님께서 하셨대요. 예수님도 하셨으니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도 쫓아가야 되겠죠.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에 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저와 약속을 좀 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 이웃에게 나가서 그 기쁨을 나누자, 이러지 마시고요. 이번 한 주, 우리 가정 안에서 내 아내와 내 남편과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뭘 나누시라고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나누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내가 새로운 사람 되었다는 것들을 나누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예배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알지 못하는 두 분의 죽음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뭘 나눌 수 있을까, 내 인생에 뭘 나눌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요. 저는 우리가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어요. 저는 제 자녀들에게 좋은 것들만 남겨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좋은 이야기, 좋은 것들로만 이야기해요. 그게 좋은 것처럼 생각을 해요. 맞아요, 그게 좋을 수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인생을 살아보면, 내 사랑하는 사람과 항상 좋기만 했습니까?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와, 내 자식과 항상 좋기만 했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 정말 싫을 때도 있었고,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고, 답답할 때도 있었고요.

그런데 성도들에게 기쁨은 뭔지 아세요? 그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면요, 내가 만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은혜예요. 여러분, 추억을 그냥 망각의 영역으로 떠나보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왜요? 그 아픔조차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가 되는 거예요. 성도들에게는 더 그래요. 내 못난 자식도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 교회 공동체도 똑같아요. 누가 더 뛰어나고 누가 더 연약하고가 아니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왜요? 교회에서 뭘 경험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거예요. 여러분, 못난 사람, 내가 지금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긍휼하심을 경험하시겠어요? 저같이 못난 목사가 여러분을 목회하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