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 14-30절 배척 당하시는 예수
누가복음 4장 14-30절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들어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이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의 기대감은 어떠했습니까? 누가는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던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었거든요. 예수님의 탄생부터 아주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했을 때, 예수님이 세례받으시는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했고, 지난 3주 동안 저희가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시는 것을 통해서 이 마귀가 질문하는 것들이 있었죠. 시험했던 근거가 뭐냐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희가 3주 동안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그 시험을 이기셨어요. 승리하셨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늘 읽은 본문이 오늘 저희가 보는 것인데요,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그러한 경험들, 누가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하면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기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첫 설교를 하셨을 때 정말 많은 사람이 모였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마다 정말 놀라운 기적과 놀라운 하늘의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고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내용이 다 담겨 있습니다.
분명히 갈릴리에 들어가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갈릴리의 결론은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4절, 15절에서 이야기해요. 그리고 16절부터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나사렛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어떤 일입니까? 바로 배척받으시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이 사실은 두 개의 다른 사건이지만, 누가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그 두 사건을 대조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이었던 거죠. 우리의 기대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 세상에 전하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누가는 우리의 눈을 예수님의 성공하는 그 스토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 땅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방향이죠? 예수님께서 배척을 당하시는 거예요. 낭떠러지에 밀려서 떨어져 죽을 수 있는 상황으로 몰리신다는 거죠.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혀 안 이상한, 전혀 고민을 안 하시는 표정을 짓고 계시는데, 저는 이게 사실 이 이야기가 결국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걸어가신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십자가의 길이죠. 십자가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길은 좁은 길이고,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거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그 근본에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 있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우리가 받을 고난을 짊어지고 가시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거죠. 그러면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는 낮아짐의 길이고, 어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실패의 길이고, 어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지질이 궁상맞는 고난의 길일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여기에 놀라운 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을 먼저 걸으셨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과연 영광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많은 분이 오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위로받자고 예수님의 이런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냐고요? 아니요. 제가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성도들이 당연히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그런데 지금 마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영광의 길을 가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영광이고, 무엇이 자랑이 될 것인가를 마귀는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단 말이에요. 상황 속에서 여러분, 여러분은 마귀가 요구하는 그 시험을 이겨내실 자신이 있습니까? 이겨낼 힘이 있습니까?
우리가 오로지 이겨낼 힘과 능력은 우리에게 있지 않아요. 어디에 있냐면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이 받고 있는 시험, 유혹, 어려운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예수님께서도 그 길을 걸으셨으니까요.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계속 반복되는 것들이 있어요.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들어가시는데, 무엇으로 들어가신다고요? '성령의 능력'으로 들어가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무엇으로 할 수 있는가. 결국 성령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 같아요. 마귀는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느끼도록 요구해요.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마귀가 뭐라고 유혹하는지 아세요? "아, 너 죄지은 거 보니까 너 예수와 함께 있지 않아. 너 그리스도인 맞아?"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요구해요.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할 때에는 그 죄 가운데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죄가 많은 곳에 무엇도 많다고요? 은혜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요? 그 가운데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성령의 능력'이라는 단어, 이 문장에 여러분이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영적 침체에서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여러분의 능력에 있지 않아요. 여러분의 자각에 있지 않아요. 여러분의 깨달음에 있지 않아요. 어디에 있다고요? 성령의 능력에 있어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실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게 하셨을 때, 성령께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들어가셨어요. 예수님이 3년 동안 공생애 생활을 하셨을 때 가장 많이 일하셨던 곳이 바로 이 갈릴리 호수 근처였어요. 거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그리고 15절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아주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 같아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들을 경험하게 된 거죠.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들에게 그냥 '훅' 하는 것 같아요. 유명한 사람을 보면, 본인이 갖고 있던 것과 상관없이 그 유명한 사람하고 사진 찍고 싶고, 그 유명한 사람 옆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 제가 꽤 유명한 목사님을 주중에 뵐 기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계속 많이 찍더라고요. 그것보다 한 10배, 100배는 더 큰일로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거예요.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이 왜 일어났겠습니까? 남자만 5천 명이 모였으니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처럼요.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왜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벌 떼처럼 몰려왔다는 거예요.
지금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유명했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몰려왔고, 그를 칭송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누가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가 그냥 상식적으로 '맞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라고 알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16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라고요. 그리고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고 하는데, 예수님에게는 이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평상시처럼 예수님께서 하셨다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나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세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기서 분명히 회당에 들어가면 회당장이 성경을 가지고 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성경을, 이사야서는 두루마리니까 우리처럼 지금 성경처럼 몇 장 몇 절 이런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두루마리에서 그냥 그 회당장이 가져오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펼치셔서, 두루마리니까 펼치는 거죠, 펼쳐서 예수님께서 본문을 '찾으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어요.
우연히 회당장이 가져왔을지언정, 예수님께서 지금 이야기하시는 건 의도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 의도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18절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을 인용해서 예수님께서 읽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을 그냥 읽으시는 거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고" 예수님께서 읽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읽고 나서 거기에 대해서 강론을 하시는 거죠, 설명을 하시는 거죠.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놀라운 이야기를 하세요. 21절에,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별로 안 놀라시네요.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내가 그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나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놀라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란 말이에요. 지금 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이슈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이 이야기를 하느냐는 거예요. 가버나움에서 이야기했으면 칭송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디서 하고 있는 거예요? 나사렛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디서요? 예수님께서 자라났던 곳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나사렛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놀라긴 놀라요. 똑같은 반응을 해요. 놀라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놀라면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22절에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뭘까요? "내가 요셉 아는데, 요셉은 목수 아닌가? 그 집에 아들과 딸들이 있는데, 지금 저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 아닌가? 그런데 그가 어떻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가 어떻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가 어떻게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할 수 있는가? 그가 어떻게 눌린 자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거예요. 왜요?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어릴 적에 했던 일들을 알고 있어요.
성도 여러분, 이 질문이 예수님께만 도전적으로 전달되었을까요? 사실은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기 전과 후에 우리는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그 고백을 우리의 삶 속에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잖아요. 안 하시더라도 한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해요. 그런데 문제가 어디서 생기냐면,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친한 친구들이 "야, 너 왜 그래? 왜 이렇게 갑자기 이상한 짓 해?"라면서 시작하는 거죠. 왜요? 그들은 여러분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옛날에 저희는 '수련회'라는 곳들이 있었어요. 3박 4일, 일주일 동안 산에 올라가서 열심히 기도하면 우리가 뭔가 세상을 변화시킬 것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딱 내려오잖아요. 가장 큰 마귀 같은 존재가 누구인 줄 아세요? 가족이잖아요. 은혜받았는데 갑자기 일을 시켜요. 하기 싫은 걸 하라고 해요. 은혜받았는데, 우리 생각에는 은혜받았으니까 그걸 잘 감당해야 하는데, "왜 내가 지금 이 거룩한 기분을 망치냐"고 하면서 오히려 싸우죠. 그러면 뭐라고 얘기하세요? "은혜받고 왔다면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하죠. 다들 경험을 안 하신 것 같은데요? 저는 많이 경험했어요. 제 중고등학교 때 교회를 열심히 생활하면서 그런 경험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약간 우스갯소리이지만 진리가 한 95% 정도 들어가 있는 고백을 하나 할게요. 전 목사잖아요. 그리고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잖아요. 그러면 그 말씀을 전했을 때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저희 아내에겐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소원인지 아세요? 제가 그냥 강대상에 계속 있으라고. 아, 이 조크를 모르시는구나. 그냥 당신은 강대상에 계속 있으래요. 내려오지 말라고요. 여러분, 그게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큰 어려움인 것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려고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도전하고 우리에게 유혹하고 시험을 할 때가 참 많아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나사렛 사람들이 시험하는 내용들이 있어요. 어떻게 요구하냐면, 이렇게 요구를 해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23절에 이렇게 이야기해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여,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그들이 요구했던 게 뭐냐면, 나사렛 사람들이 "우리에게도 한번 기적을 보여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되게 비슷하지 않아요? 뭐가 비슷하죠? 광야에서 마귀가 시험했던 내용하고 비슷해요.
"그 돌을 떡으로 만들라", "행함을 보여달라",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라, 그러면 천사가 와서 보호할 것이다"라는 것들을 계속 요구했었어요. 마귀는 계속, 끊임없이 증거를 보여주는 '행함', '행위'를 요구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것으로 반박하시고 그 시험을 이기시는 것들을 저희가 살펴봤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기적을 베푸셨으면 간단한 거 아닌가요? 아니,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안 베푸셨던 것도 아니고, 가버나움에서 계속 기적을 베푸셨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셔요. 그리고 기적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드세요.
참 이상한 예를 드시는 거예요. 예를 드시는데,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의 예를 들어요. 하나는 엘리야 시대 때에 엘리야를 보살폈던 사르밧 과부를 드세요.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엘리야를 보살폈던 과부는 누구냐. 그런데 그 과부의 고향은 어디죠? 시돈 땅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시돈 땅은,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원수의 땅이에요. 성경에서는 두로와 시돈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곳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시돈'이라는 글자만 나와도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지금 예수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장소의 여인을, 성경적인 근거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졌던 사람이 누구냐, "시돈의 과부 아니었냐"라는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나서 엘리사 시대 때 이렇게 이야기해요. 엘리사 시대 때 나병 환자가 많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병 환자 누구를 고쳤느냐? 나아만 장군을 고쳤다는 거예요. 나아만 장군은 누구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의 장군이에요. 한마디로 원수예요.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세요? 여기서, 저희 한국 축구가 지면 안 되는 나라가 있어요. 무슨 수가 있어도 지면 안 돼요. 그 나라는 어느 나라죠? 일본이에요. 그렇죠? 뼛속 깊이 우리는 일본에게 지면 안 돼요. 그런데 갑자기 일본에게 져도 된다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심지어는 일본이 이제부터 항상 이겨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좀 이해가 쉬우시죠? 바로 그러한 상황이라는 거예요.
요즘 미국의 캠퍼스가 상당히 시끄럽습니다. 시끄러운 이유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 때문이에요. 누가 맞느냐 틀리냐, 뭐가 맞느냐 틀리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이 싸움은 정말 두 민족이 몇천 년 동안 뼛속 깊이 싸워왔던 일들의 반증이에요. 누가 하나 그냥 물러날 수 없는 일들이에요. 그런 감정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산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했었던 것들이 이해가 가능할까요, 안 할까요? 가능해요. 여러분, 이상한 거 아니에요. 가능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게 왜 가능하냐는 거예요. 왜 가능할까요?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예수가 신성모독했기 때문에 예수를 산 낭떠러지에서 밀쳐서 죽게 해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충성하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끔 이 나사렛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종종 있어요. 어떻게 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경험, 우리가 살아왔던 신앙의 근거에 의해서 예수를 내가 알고 있는 예수로 판단하고, 내가 예수를 알고 있는 식으로 대하는 모습들이 우리에게 종종 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도 기적을 베풀어주십시오. 우리에게도 특별한 깨달음이 있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종교성을 표현했을 때 항상 그런 식으로 가요. "내게 하나님께서 큰 기적을 보여주신다면, 하나님 내 기도를 응답하시면,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내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항상 조건적인 이야기를 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베푸심에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상식선을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배척당하심을 통해서 뭐가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옛날 일을 근거해서 시돈 땅의 한 과부의 이야기를 함으로 말미암아, 수리아 장군의 이름을 거명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일들을 예수님께서 이루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이 임하시면 하시는 일, 뭐라고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가 다시 보는 일들, 포로 된 자가 자유를 얻는 일들,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는 일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모습에 있습니까?
저는 누가복음을 읽을 때 우리에게 중요한 한 가지 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은 소외된, 힘없는 자의 눈으로 읽으셔야 은혜가 돼요. 무슨 말씀인지 아세요? 가진 자로서, 파워가 있는 자로서 읽으면 부딪힘으로 와서 회개하게끔 만들어지는 것이 사실은 누가복음의 중요한 힌트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는 가끔 우리의 위치를 오해하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아요. 특별히 제가 볼 때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참 자기의 위치를 오해할 때가 많아요. 우리가 참 우리를 선민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를 제2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적인 개념에서는 하나님 백성으로 축복을 받았죠. 그러나 신학적인 개념으로 보면 과연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을까요? 로마서의 표현으로 이야기하면 '잘려진 가지'라고 이야기해요. 버림받은 가지예요.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버림받은 가지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유대인들처럼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율법,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는데 우리는 자꾸 옛 시대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에 가면 십자가와 함께 이스라엘 국기가 함께 있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해요. 여러분, 오늘 본문은 거기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어요. 너희의 존재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도, 너희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는 어디로, 열방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실하게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와 같은 버려진 자들, 이방인들을 위함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서 전혀 개의치 않으셨을 때 뭐라고 고백하죠? "내가 개와 같은 대접을 받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먹게 해주십시오"라는 표현을 써요. 그게 뭔지 아세요? 내가 개냐 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거예요. 여러분, 성도가 된다는 건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belonging)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앞에 속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직업을, 여러분의 재정 상태를, 여러분의 명예를, 여러분의 건강을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판단하시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은혜'라고 이야기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고, 여러분의 직분이 어떻고, 여러분의 가족이 몇 대째 신앙의 가족이고, 이런 것들 다 버려버리시고요.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헌신했고, 그런 것 다 내려놓고요. 그런 것들은 정말 배설물처럼 여기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뭐냐면, "하나님,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나는 감사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과부였습니다. 과부처럼 엘리야를 섬겼던 것처럼, 지금 내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는 이 자리에 있게 하심을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고백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나병 환자 되는 것이 좋습니까? 나병 환자 되는 거 좋은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나아만은 나병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여러분, 지금 고난의 길을 걷고 계세요? 만약 여러분이 그 고난의 길이 아니었으면 예수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지금 이 고난의 길이 나에게 은혜일 수 있어요. 이것은 제삼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겠죠. 그러나 본인이 그것을 경험하고 본인이 그러한 간증을 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왜요?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천국을 만나고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세상 사람은 조롱하고, 세상 사람들은 동정의 눈으로 볼지언정, 하나님과 함께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에게는 축복과 은혜가 된다는 것, 그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냐면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오셨고, 그 이야기를 지금 이 나사렛 회당에서 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누가복음, 복음서는 끊임없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들, 예수를 마귀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베푼다고 고발하는 사람들, 한 부류가 있고, 또 다른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리고 정말,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만지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어디에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죠? 몰래 옷자락을 만지고, 예수님 앞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임함을 저희가 볼 수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식, 여러분의 능력, 여러분의 종교심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종교적인 열심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에게도 권면하고 저에게도 도전하는 건데,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고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려고 예배에 나와 계십니까? 예수님 앞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내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고, 이것이 우리가 찾아 나가야 할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라고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들어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일상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정으로, 우리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의 직장과 사업체 안으로 들어가서 담대하게 좁은 길, 담대하게 고난의 길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축복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