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 9-13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누가복음 4장 9-13절
9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삶을 살다 보면 의심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정말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과연 내 길이 올바른 길인가, 정말 하나님이 계시긴 한가, 천국이나 지옥이 있나 하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일들조차도 가끔 의심하게 됩니다. 왜 의심을 하게 될까요? 우리의 믿음이 약해서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믿음이 약하니까, 신앙의 정체기니까 의심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의심이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의심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의심 없이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내면은 그렇지 않거든요. 여러분, 테레사 수녀님을 존경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그런데 테레사 수녀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나온 문서를 보면, 그녀 안에도 여러 가지 갈등과 고민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자들에게도 의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의심이 있는가, 오늘 본문과 지난 3주 동안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의심도 있지만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의심거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시험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이간질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집니다. 그 질문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라는 질문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명령하셨던 것들을 뒤틀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다시 한번 고민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이것인가?’라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게 되는 거죠. 사실 그것이 인류 역사상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종이 됨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오늘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장소인 광야와 같은 곳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땅에서 곧장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살 때,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고 유혹을 당하고 이간질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마귀는 무엇에 대해 유혹할까요? 마귀가 우리에게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와서 “너 하나님 믿을래, 안 믿을래?”와 같은 시험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귀의 이간질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입니다. “정말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느냐? 네가 그런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할 것 같으냐?” 그런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대부분 내가 한 일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죠. 그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열쇠를 쥐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마귀와의 싸움 속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열쇠 말입니다.
그 열쇠가 무엇인지 오늘 좀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 시험인데,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은 시온성, 즉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이 임한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성전이 가장 중요하겠죠. 성전 꼭대기로 끌고 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놀라운 경험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는 항상 완벽해야 하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하게 대화하고 행동하며, 항상 종교적인 언어와 은혜로운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런 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런 곳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사탄은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도전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네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면”이라는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시편 91편 11절부터 12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떨어져도 천사가 붙들어주기 때문에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근거로 유혹하는 거죠.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예화를 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여러분, 목사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실까요, 보호하지 않으실까요? 보호하시겠죠. 그래서 많은 경우 목사는 교통사고도 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저께 하이킹을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개에게 물렸습니다. 주일 설교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날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습니다.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하나님의 사람인 목사를 보호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아주 조그만 치와와 같은 개에게 물리다니요.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사탄이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구약에서 예언했던 것처럼, 몸이 하나도 상하지 않는 것이 메시아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그런 얘기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축복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가정이 잘 돼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병에 걸리고 왜 힘들어?”라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환경과 사람을 통해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유혹하고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하실까요? 그냥 뛰어내리셔서 천사들이 받쳐주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모든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러자 13절에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갑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사탄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16절에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사’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며 불평합니다. 그때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목마름 때문에 불평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가 해결되지 않자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의심하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항상 끌고 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관계를 내 입장에서만 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부분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할 때는 내 필요, 나에게 중요한 것들이 해결되지 않을 때입니다. 여러분이 원했던 것, 평생 동안 간구했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으시나요? 갑자기 가지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없어질 때, 그 가운데 의심과 답답함이 생기고, 그것이 심해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다는 것의 가장 좋은 예는 다니엘의 세 친구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들은 절하지 않습니다. 그 벌이 풀무불에 던져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여러분,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이 말을 할 때, 우리의 전제 조건은 바로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보다 더 큰 하나님의 언약, 영생이라는 축복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린 후, 사탄은 예수님을 광야로 끌고 가 세 번 시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심으로 시험에서 이기셨고, 사탄은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탄이 유혹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탄이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맺은 언약을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언약이 깨질 수 있는 것처럼 생활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직 그 하나님의 관계를 온전히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혹당하고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항상 ‘나’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내 필요, 내 힘의 부족, 내 노력의 부족,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해서, 모든 것이 ‘나, 나, 나’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시험하지 말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을 이길 힘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실패한 그 길, 저주받을 그 십자가의 길을 대신 걸어가신 것은 바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하나님, 나 이거 필요한데…”라며 스스로 그 시험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광야에 있는 동안, 심지어 성전 꼭대기, 가장 은혜받는 그 순간조차도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우리는 뛰어내리려고 하거나, 용기가 없어서 마귀에게 복종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깨져도 예수님께서 이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받는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험에서 능히 이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쉽지 않습니다. 의심하고 시험받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저도 의심하고 시험받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끊임없이 매 순간이 의심이고 시험인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이길 힘이 있나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떤 부분은 해결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럴지라도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늘 해결되지 않은 관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오늘 실패하고 좌절하고 깨질지라도, 내가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붙잡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절대로 깨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성령이시고, 그리스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근거로, 우리는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오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여정을 이끌고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실패의 답안지를 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의 답안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이기신 정답을 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내 자녀’라고 불러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바로 그 은혜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