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 5-8절 두 번째 시험
누가복음 4장 5-8절
5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고,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누가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광야의 시험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거죠. 저희는 누가복음을 읽을 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사건이 우리에게는 별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상황에서는 이 시험을 이겨내신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니 당연히 이기셔야지'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광야의 시험을 단순히 예수님께서 거쳐 가셔야 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로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시험받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을 수 있고 또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광야가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첫 독자였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들에게 광야는 생명이 없는 황폐한 곳, 절망과 답답함이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광야에 머물렀던 이유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저는 성도들에게 광야란 바로 ‘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곧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도들은 매주 모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 시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함께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임한 천국을 경험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는 것은 미래에 천국에 간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교회이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 순간 이 좋은 예배의 기쁨을 누리며 살지는 못합니다. 이 예배가 끝나면 여러분은 당장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 년 전만 해도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주일을 지내고 월요일부터 세상에 나가서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라고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민교회의 상황을 보면, 예배가 끝나자마자 마켓에서 쇼핑하며 세상과 접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일마저도 세상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광야를 사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유혹과 시험을 받습니다. 지난주에 다룬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이었죠?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이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이 시험의 본질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광야를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의 핵심은 ‘만나’였습니다.
여러분은 광야 같은 삶의 매 순간 만나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돈을 더 벌고 편하게 살고 싶어서, 정말 필요한 만나보다 더 많은 양을 긁어모아야 평안을 느끼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쉬울까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광야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경험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의 구주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내가 모아둔 만나가 썩어 먹을 수 없게 되는 경험을 통해서라도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읍니다. 어느 순간 돈이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내가 잘못된 것을 의지했구나’ 깨닫고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다"고 고백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봤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의 유혹은 광야에서 사는 사람들이 가장 받기 쉬운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끌고 올라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이런 것으로 유혹하지 않습니까? 천하 만국을 준다는 개념보다는 ‘권위와 영광을 네게 주겠다’는 말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죠?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제외하고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했는지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영광’ 아니었나요? 영광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다면 ‘자존감’이나 ‘명예’는 어떻습니까? 내 이름에 흠집이 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존경받기를 원하는 마음. 우리는 그것을 위해 평생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가정에 적용해 봅시다. 아버지로서 대우받고 싶지 않으셨나요?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누리고 싶지 않으셨나요? 아들과 딸만큼은 나를 아버지처럼 여겨주기를 원하지 않았나요? 제가 요즘 가정사를 너무 이야기해서 저희 아들과 딸들이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눈길을 줍니다. 제 이야기를 또 한다고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더 잘 설명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말씀드리자면, 제가 어제 대단히 큰 시험에 빠졌습니다.
요즘이 세금 보고 시즌이지 않습니까? 저희 딸이 집에 온 이유 중 하나도 세금 보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을 처리하며 회사 베네핏(benefit)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수익자(beneficiary)가 누구인지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보니 수익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었습니다. 아내 이름은 있는데 제 이름은 없더라고요. 순간 ‘나는 저 애들한테 어떤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에게 너는 어떠냐고 물으니 마찬가지로 엄마만 넣어두었습니다. 그 순간 ‘나라는 존재는 뭔가? 그래도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쉼 없이 아버지로서 노력했는데, 나의 명예와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생각에 인생이 허무해졌습니다. 웃으시는 분도 계시지만,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광과 권위를 위해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십니까? 왜 더 좋은 차를 타려고 하고,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 하십니까? 그것들이 나를 만들어주고, 나에게 영광을 주며,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증명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녀들에게 그토록 집착하십니까? 내가 못 이룬 것들을 자녀를 통해 이루고, 그들을 통해 내가 영광 받고 무언가 보여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험이 예수님께 적용되느냐 마느냐를 떠나, 우리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그 어려운 시험을 예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시험에서 늘 졌고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그 문제에 초연했다면, 아이들이 수익자를 누구로 하든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꽤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상하더라고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대접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과 마귀는 이렇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 천하 만국의 권위를 내가 너에게 주겠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인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6절입니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마귀는 이 권세를 넘겨받았다고 말합니다. 누구에게 넘겨받았다는 걸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권능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일어났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 뱀이 여자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은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약간 비트는 것입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우리를 유혹할 때,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끌어들여 이야기합니다. 특히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권세를 주셨다"는 식으로 진리를 약간 비틀어서 말합니다.
진리가 가장 위험할 때는 진리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무언가 가미될 때입니다. 즉, 진리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기에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이단에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과 결합된 유혹 앞에서는 진리를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마귀는 항상 이렇게 속삭입니다. "왜 꼭 십자가의 길만이 참된 진리라고 할 필요가 있어? 다른 길도 하나님께서 원하셔."
교회 안에서 이야기되는 기복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복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나요?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복’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잡고 원하고 바라는 것은 세상의 돈, 권력,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서운 점은, 마귀가 "하나님이 나에게 천하 만국을 소유하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권세를 넘겨주셨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의 욕망을 채우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모습이 너무나 많습니다. 목사도, 성도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무너지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앞입니다. 목사가 강대상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해야 합니다"라고 선포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니 받아들여야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 뒤에 목사의 욕망과 욕심이 숨어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강대상에서만 일어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강대상뿐만 아니라, 성도 여러분도 동일한 욕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왜 열심히 봉사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선교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한국 교회의 많은 부분이 내가 잘되고 복 받고 싶어서 그런 동기를 가집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이유조차 내가 복 받기 위해서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복’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아무 이야기도 되지 않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이러한 유혹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했을 때,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답하십니다. 너무나 많이 들어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말씀이지만, 사실 행하기는 가장 어렵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큰 신상을 세우고 모두에게 절하라고 했을 때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목숨을 건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는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어디서 당하고 있습니까? 바로 ‘광야’에서입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며 광야를 ‘세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주 7일 중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여러분이 생활해야 할 직장과 가정,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속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을 교회 생활에만 한정한다면, 우리는 모두 잘하고 있고, 또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 생활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는 봉사 열심히 하고 헌신하면 복 받는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주일에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주 6일의 삶, 여러분의 인생 전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직장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것이며,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너의 주인이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마귀에게 절하는 것은 마귀를 주인으로 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주인이 바뀌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왕적인 권위, 즉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에덴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주인은 마귀, 사탄이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약속했던 권위와 영광, 즉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이 더 달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고백해야 할 것은 "나의 주인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세상의 통치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게 쉬울까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있는지 우리가 서로 잘 압니다. 그래서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며 때로는 꾸짖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말했듯이, 마귀의 전략은 어쩌면 이럴지도 모릅니다. "그래, 주일 3시간은 그냥 내버려 두자. 자기들끼리 예수 잘 믿는 척하게 하고, 나머지 6일 동안은 내 권세 아래 있게 만들자." 우리는 사탄의 전략에 너무 쉽게 휘말리는 것 같습니다. ‘주일날 이렇게 열심히 했으니 이제 세상에 나가서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아’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열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열망은 우리가 바라보는 곳에, 우리의 발걸음이 움직이는 곳에 있습니다. 냉철하게 말해, 그곳은 하나님과 떨어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라보는 방향과 발걸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길을 쫓아가야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권위와 영광을 쉽게 줄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쉬운 길을 거부하시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라는 목적에 너무 중심을 둘 때가 있습니다. 세상 구원이 목적이라면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됩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의 목적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성자 예수님의 목적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축복받고 구원받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자녀가 되어 그가 주시는 것들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에서는 십자가의 길, 고난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가지 않고 거스르는 삶, 손해 보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직장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남자들이 자녀들을 위해 얼마나 희생합니까? 그런데 자녀들이 우리를 어머니의 반의 반만큼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우리 남성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서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수익자(beneficiary) 명단에 하나님을 두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것을 내 공로로 돌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만 적을 뿐,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내가 대우받지 못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놓이는 모든 경험들이 결코 실패한 인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의 길이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인생으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귀와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나만 믿고 따라와. 세상에서 열심히 하면 영광과 권능을 네게 다 줄게." 세상은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좋은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반대입니다. 나의 무너짐을 통해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밖에 전할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가정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누가 옳은가’를 끊임없이 따지지만,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예수님께 가는 유일한 방법은 낮아짐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의 시험에서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께 주목해야만 무력한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과 무관한 섬김은 자기 본위의 섬김이 되고, 이는 교묘한 조종 행위가 되며, 권력 싸움으로, 폭력으로, 결국 파괴로 이어진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이 사역이라고 불릴지라도 말이다."
결국 인간의 본성은 자기 정당화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무관한 모든 행위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행위, 봉사와 헌신조차도 하나님과 무관하다면 가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과 직장의 이야기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과 연관 있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연관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영광과 욕심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반면 세상에서는 아예 하나님과 연관된 행위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 모든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만을 섬기라."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자녀와 남편과 아내에게 보여주기를 소원합니다. 내 연약함과 부족함이 드러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이 우리 가정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직장과 사업체에서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기쁜 일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실패자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그 길에 동참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언코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실패자, 낙오자라고 부를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하늘나라에서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불러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그것을 어디서 누릴 수 있을까요? 바로 교회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가 달라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세상은 평가하고 비판하는 데 익숙하지만, 교회는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기뻐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고, 즐거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닐까요?
우리가 볼 때 서로 부족하고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가치 있게 여겨주어야 합니다. 한국 부모님들은 자녀가 잘해도 겸손 때문에 "우리 애는 참 부족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에 대한 칭찬과 감사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여기셨다고요?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저를 어여삐 여겨주시고 괜찮은 목사,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주시면 저는 행복해집니다. 저 또한 여러분을 감사하고 기쁘게 여기면 우리 서로가 기쁘고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운명처럼 이 교회로 부름받아 함께 예배하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운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 자체를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마귀는 결코 우리를 시험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자꾸 우리를 나누고 평가하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평가, 즉 서로를 기쁘게 여기는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마귀의 시험에 넘어갈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공동체 안에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가려고 할 때, "성령님,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며 함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