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57-80절 구원의 뿔
누가복음 1장 57-80절
57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매 62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67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그 답답함을 안다는 것도 저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답답한데, 그 답답함조차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많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분은 영적으로 답답함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저는 영적으로 답답함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 교회 다니는 분들 가운데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그냥 교회 다닌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생활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우리는 종교 생활을 잘한다거나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사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듭니다. 영적으로 답답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좌절하게 만들기도 하고, 기쁘게 만들기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게 만들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자책감에 빠지게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열정적이고 기쁘게 하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는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특별히 주일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가끔 마음에 찔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찔려서 ‘그래,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쪽으로 가기보다는, 왠지 모르는 답답함이 생기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그 답답함이 무기력함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반응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 가운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점점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을 안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저는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가랴라는 사람은 성전에서 일하다가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의심하는 반응을 보였고, 그 후 벙어리가 되어버립니다.
벙어리가 되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이야기한 것이 정말로 맞아떨어지는 그 사건 속에서 사가랴는 놀랐을 것입니다. 놀랐는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답답할까요? 미치도록 답답했을 것입니다.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을 보면서도 답답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사벳이 해산하였고, 이제 할례를 받을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할례를 받을 때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라고 정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아들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지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놀랍니다. 유대인의 관습상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보통인데, 갑자기 난데없이 엉뚱한 이름을 갖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을 못 하는 사가랴에게 서판을 가져와서 뜻을 묻습니다. 그가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그때 오늘 본문 6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는 순간, 그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답답함이 해결되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우리의 답답함도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 성도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각자의 이름이 있지만, 성도의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은 제자, 또는 성도라는 표현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성도’라 다시 한번 불렀을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을 때, 여러분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신앙의 고백이 터져 나오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정말 신앙의 무기력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목격하게 됩니다. 기력 없이 힘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가랴는 인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말하고 싶어 하는 욕망들, 아마 마음속으로는 수도 없이 가브리엘 천사가 했던 내용을 읊조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는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와 만났던 그 순간과, 10개월 동안 그가 어떤 마음의 심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 기쁨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사가랴의 고백들을 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트이자마자 처음으로 했던 내용들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예언했다’고 표현합니다. 67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지금 누가복음 1장에는 꽤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함’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령 충만함으로 받아 지금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함을 받은 우리들, 성도들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바로 복음의 증거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가랴와 같은 기쁨을 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입속에서 사가랴와 같은 예언의 이야기가, 찬양의 이야기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근본은 바로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는 그 내용들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6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주 짧은 구절이고 우리가 너무 많이 들었던 내용입니다. 찬양의 대상을 말하며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어마어마한 무게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이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요, 10개월 동안.
10개월 동안 그는 몸소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지금 죽음의 골짜기처럼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까? 어쩌면 요셉처럼 구덩이에 떨어져 있습니까? 친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임 당할 뻔한 가운데, 요셉은 구덩이에 홀로 있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우리는 아마 그런 인생의 과정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행복하고 즐겁고 수많은 친구를 가졌다고, 일 때문에 너무 바쁘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 외롭다, 내 인생에 대해 나눌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가랴가 그 경험을 한 것입니다. 10개월 동안 그는 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기간 동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이 있은 다음에야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라는 고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외로움, 여러분의 고난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찬송하리로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여!”, “찬송하리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외로움, 고통, 좌절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성령을 통해서 보시기를, 그리고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에서는 성령께서 오셨다가 가시는 것처럼, 즉 항상 계시는 것이 아니라 특정할 때 오시는 것처럼 표현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특히 오순절 사건 이후로는,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인지하든 깨닫지 못하든, 성령께서는 늘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하는 그 순간조차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품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홀로 있을 때, 좌절했을 때, 정말 나 혼자 있었던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때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겨내게 하고, 좌절하지 않고 그래도 한 발자국 내딛게 하셨던 분은 결국 성령 하나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이고, 이렇게 고백했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말문을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해가 가십니까? 저 같으면 "찬송하리로다, 나에게 요한이라는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아주 개인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간구했던 내용이 이루어졌으니, 그 이루어진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의 경력이 잘 풀렸으니 감사하고, 너무너무 힘들게 살다가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에 감사함을 얘기해야 합니다. 내 육신이 어렵고 힘들었는데 잘 이겨내고 나니, 하나님께서 날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하는 것. 이처럼 우리는 어떤 일의 결과로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가랴는 그런 감사 이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구원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첫 고백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기에 여러분들이 집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사가랴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어떻게, 무엇 때문에 알았을까요? 저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때 가브리엘 천사를 만남을 통해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을 본 것처럼, 만난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 그 하나님의 약속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짐을 통해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계십니까? 안 만나고 계시는 것처럼 느끼실 수 있지만, 여러분은 만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녀 삼으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왜 말을 못 하고 있냐면, 우리는 가끔 착각 속에 사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울증이 깊어지면 환상을 본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가 착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버려졌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한번 붙잡으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든, 정말 행복하든, 어려워서 좌절하고 절망하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착각과 망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우리 모두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고,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의 놀라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10개월 동안 무엇을 보고 다시 한번 생각났을까요? 아내의 모습을 보고 결국 다시 생각난 것입니다. 자식의 태어남을 보고, 다시 한번 확증되고 확증된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아이를 품고 아이가 자라는 것처럼, 나의 믿음과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각 성도의 모습을 통하여. 지난주에 제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봤을 때 상대방을 보지 말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각 상대방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찬양하십시오. 그 사람을 그냥 그 사람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판단하십시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나의 아내와 남편과 자식과 성도들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는 늘 부정적인 면을 보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우울해지고 더 답답해지는 것 같습니다. "아니, 뭐가 볼 게 있다고 이 웬수를..." 보고 좀 기쁨이 느껴져야 하는데, 나와 거의 비슷하거나 거기서 거기고, 심지어 나를 속상하게 하고, 교회에서는 대단한 믿음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집에만 오면 딴짓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성인군자들이 백 년 동안 헌신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들이 "I do. 내가 당신의 아내가, 남편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용서입니다. 화해입니다. 긍휼함입니다. 사랑입니다. 사가랴는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게 그의 첫 고백이었지 않습니까. 엘리사벳의 배를 볼 때마다 '내가 좀 더 담대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하지만 사가랴는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다윗의 언약이 완성된다는 것을 기억해냈던 것입니다.
사가랴는 내 아들이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아들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러 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다윗의 가문에서 영광과 권력이 주어지는 일들로 나타날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기도했던 건강이 나아지는 것은, 단지 건강이 좋아져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건강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편안하게 살게 되는 복을 받는 것은, 그저 돈과 명예가 많아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전파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사무엘하 22장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사가랴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의 구원자,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저는 이 사가랴의 찬양과 고백이 우리의 찬양과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어렵고 외롭고 힘든 가운데 있더라도, 아니, 여러분이 아무리 행복하고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구원의 뿔이시요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기뻐하시고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가랴는 10개월 동안 그것을 경험했고, 이제 그에게 주어진 축복의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7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여."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축복인 그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지금 다시 한번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 삶의 목적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로서 여러분의 이름이 바뀐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례 요한과 같은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자였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길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외치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78절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외쳐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일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바로 이겁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 교회 안팎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돋는 해가 그들을 비추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사하는 존재입니다. 스가랴가 10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을 전하고 싶어 하다가 입이 터지자마자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세상에 나가 우리 이웃에게, 가정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실 것을 우리의 가정과 서로에게, 그리고 후세에게 전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고통이나 느낌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다면, 너무나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누군가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말해주지 않으면 그 무게를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저는 어떤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부부란, 가정이란 그런 거야" 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은혜가 무엇이냐고 하면, 그것을 의미 있게 느꼈을 때, 그것이 은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미 있게 와 닿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의 몸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큰 울림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무슨 울림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 인생에 울림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하심이 여러분에게 울림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의 소리가 아무리 커도 우리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성령의 아주 자그마한 손길에 우리가 반응하면 우리 인생은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될 때 우리는 사가랴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시간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답답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내합시다. 참읍시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 입을 여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함께 찬양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